어느 백수의 오락가락 독서일기/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2)/류시화
“보라! 언제나 새로운 날들이다. 들소 가죽 천막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이른 아침의 대지와 만날 때마다 나는 그것을 깨닫는다. 눈을 뜨고 바라보기만 하면 언제나 새로운 날이다. 한겨울의 바람, 봄을 기다리며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 평원으로 난 작은 오솔길들.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을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나뭇가지 위에도, 작은 개미굴 속에도, 북풍한설 흩날리는 나뭇잎들 속에도 있다. 돌을 들춰보면 그곳에서 어떤 것들이 움직인다. 그 삶들이 가만히 내 삶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삶을 언제까지나 사랑해 왔다. 내게 주어진 어떤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님을 믿기 때문이다.” 인디언 추장 ‘상처입은 가슴(운디드 하트, 델라웨어 족)’의 연설문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그렇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온 천지가 삶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래서 내 삶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 천지의 삶이 중요하다. 그들 각각의 삶은 각각 존중받아야 한다. 삶을 불성佛性으로 바꾸면 붓다의 말이 되고, 조사祖師의 말이 된다. ‘위대한 정령’이며, ‘위대한 신비’이기도 한 자연은 자체로서 큰 스승이다. 이는 붓다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상처입은 가슴은 또 이야기한다. “눈을 감고 평원의 오솔길에 앉아 있으면 다양한 소리들이 우리가 살아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새소리, 바람 소리, 물이 흘러가는 소리, 작은 벌레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햇살이 나무줄기를 부러뜨리는 소리, 나비의 날개가 부딪히는 은밀한 소리, 그리고 침묵의 소리까지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 참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들인가. 인디언들에겐 자연의 온갖 소리들이 신비였고, 숨 쉬고, 걷고, 앉아있는 자신 역시 신비였다. 자연과 함께하는 명상 속에서 인디언들은 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각각의 현상들도 결국엔,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하나임을 깨달았다. 상처입은 가슴이 다시 이야기했다. “문명인들이라고 하는 얼굴 흰 사람들은 왜 거꾸로 가는가? 당신들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산을 깎아 결국 손에 얻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으로 당신들의 영혼을 맑게 할 것인가? 한 줌의 맑고 신선한 바람이 큰 교회당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당신들은 모르는가? 들쥐는 찌르레기에게 들쥐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찌르레기는 들쥐에게 찌르레기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 인디언들 역시 누구에게 자신의 믿음을 선전하고 강요하는 것을 금기로 삼고 있다.” 추장의 말은 2000년도 더 전에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한 말과 너무나 비슷하다. 도가道家의 깊은 사유가 그들의 일상에서는 누구나 실천하고 있는 삶이었다.
‘영원한 천둥(델 아위케웨, 모호크 족)’의 이야기를 읽다가 불현듯 한 깨달음이 다가와 책을 놓았다. 아니 깨달았다는 말은 건방지고 오만하다. 내 수준에 맞게 ‘한 생각이 다가왔다.’로 고친다. 나무 한 그루 밑에서 깨달은 영원한 천둥의 이야기는 이렇다.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한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그때 나무 밑으로 씨앗 하나가 공중제비를 돌며 내 발밑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 씨앗에 시선이 이끌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앞서 떨어진 수많은 씨앗들이 있었다. 씨앗이 그토록 많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씨앗들 하나하나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랄 수 있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나는 고개를 들어 씨앗이 떨어진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도 수천 개의 씨앗이 매달려 있었다. 내가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낀 것은 바로 그 나무 아래서였다. 그 나무 한 그루 속에 거대한 숲이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어떤가? 붓다도 한 그루 나무 아래서 깨달았다. 씨앗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숲이 되는 인因과 연緣의 순환, 윤회의 철학이 영원한 천둥의 말 속에 들어있지 않은가.
믹맥 족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추장은 끝없이 요구하는 얼굴 흰 사람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당신들은 가당치 않게도 우리를 업신여기고 있다. 프랑스에 비하면 인디언들의 땅은 지옥과도 같다고 당신들은 말한다. 프랑스는 천상의 낙원이며 모든 종류의 물질이 풍부하게 늘려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곳을 떠났는가? 무엇을 위해 아내와 친척들, 친구들을 떠나 해마다 목숨을 걸고 이 먼 곳으로 오는가?...... 해마다 당신들이 조금이라도 잘살아 보겠다고 바닷게들처럼 우리 해안으로 밀려드는 것을 보면 당신들의 처지가 어떠한지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필요한 것 이상을 갖는 것을 죄악이라 여겼다. 단지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임을 깨닫고 순응하는 길을 택하고 살아갔다. 그것이 ‘성숙한 어른’의 길이었다. 반면 얼굴 흰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그것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파괴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덜 자란 아이’의 길이었다. 그래서 호피 족의 ‘케웬합테와’는 얼굴 흰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위대한 정령이시여, 얼굴 흰 사람들을 축복하소서. 그들에겐 당신의 지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우리 인디언들을 없애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들은 힘이 주어졌을 때만 안심합니다. 그들을 축복하소서. 그들에게 우리가 이해하는 평화를 보여주소서. 겸허함을 가르치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언젠가는 그들 자신과 그들의 아이들까지 파괴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우리의 형제니까요.” ‘절름발이 사슴(존 레임 디어, 수 족)’도 이야기한다. “우리 인디언들은 기도한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원에서 홀로 기도한다. 우리는 얼굴 흰 사람들처럼 책에 적힌 말들을 외워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도는 아주 간단하다. 와칸당카, 퉁카쉴라, 오스비말라...., 위대한 정령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부족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어떤가? 주여! 저희들을 긍휼이 여기사 저희의 죄를 사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성경 속 그분,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하시는 말씀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자연 속의 존재들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 모두는 자연의 일부분이다.” 이 말은 라코타 족 추장 흰구름(마하스카)의 말이다. 이처럼 높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인디언들을 얼굴 흰 사람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고, 오래된 땅의 종교를 전파하고 가르치려 들었다. 위대한 자연과 함께하는 지고한 정신세계를 가진 인디언들은 웃었다. 위대한 정령과 그분의 말씀이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것은 얼굴 흰 사람들의 탐욕뿐이다. 하지만 얼굴 흰 사람들은 이러한 인디언들의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결국 인디언들은 얼굴 흰 사람들에게 떠밀려 넓은 평원과 울창한 숲을 떠났다. 그들이 사랑하고 경외한 신성한 자연, 대지와 하늘과 공기가 충만한 그곳은 얼굴 흰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거칠고 황량하거나 얼어붙은 호숫가 구석진 곳이 그들의 삶의 터가 되었다. 아직도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이 존재한다.
나는 한때, 존 웨인, 그레고리 펙, 게리 쿠퍼, 율 브린너,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아메리카 서부의 영웅적인 총잡이 영화에 빠져 있었다. 그때 인디언들은 게을렀고, 야만이었고, 싸움을 좋아하는 무법자였다. 1492년 콜롬부스가 거북이 섬(인디언들의 대지, 아메리카 대륙을 인디언들은 그렇게 불렀다.)에 발을 디딘 이후 1900년까지 수백만 명, 어쩌면 천만 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탐욕과 야만과 폭력과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인디언들이 얼굴 흰 자들이 그들의 땅에 선물한 천연두, 콜레라, 성홍열, 결핵, 홍역 등의 전염병으로 몰살당했다. 천연두 균이 묻은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일부러 선물한 그들이었다. 1910년 아메리카 북미대륙에 살아남은 인디언의 수는 22만 명에 불과했다. 아, 나는 그 시절 나의 부끄러운 무지無知에 땅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