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커스 - 아름다운 시간폭탄

by 묵PD


아직 냉기가 가시지 않은 흙을 뚫고 싹이 삐죽 돋는다. 얇고 가는 잎이지만 힘이 느껴진다. 내 정원에서 가장 먼저 새싹을 보여주는 이놈, 크로커스다. 아직 잔디는 노랗다. 겨우내 말라 사라진 풀꽃들은 그 자리가 어딘지 보이지도 않는다. 차가운 흙은 아직 굳어있다. 그 속에서 저 가녀린 잎이 돋아난다. 추위가 가시기 전, 딱 이때 나타나는 강한 녀석이다.


꽃잎은 무채색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색의 보라다. 안쪽부터 조금씩 짙어진 보라색은 꽃잎 끝에서 절정을 이룬다. 어떻게 저만큼 쨍한 색일 수 있는지, 보는 눈이 행복하게 시리다. 꽃술은 또 어떤가. ‘샛노랗다’는 말이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시린 보라와 완전히 대비되는 보색을 띤다. 서툰 화가가 원색의 물감으로 보라와 노랑을 칠하면 당장 촌스러워 보일 것이다. 크로커스는 다르다. 팽팽한 보색의 긴장감이 강렬하지만, 그 조화가 아름답다. 넓고 눈부신 꽃잎과 수줍게 가녀린 꽃술이 아름답다. 한껏 짙은 보라에 톡 하고 포인트를 준다. 그 사이 보일 듯 말 듯 한 흰 잎맥은 꽃에 강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완벽하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꽃이다. 샛노란 꽃술은 가느다란 소면 굵기로 세 가닥이 난다. 꽃도 금방 진다. 완전히 개화한 지 사나흘이면 아쉽게도 시들어 사라진다. 가을에 피는 크로커스는 샤프란이라고 부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꽃을 따 암술만 모아 말리면 향신료가 된다. 황금보다 비싸다는 향료 샤프란, 왜 귀한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저렇게 고운 색을 차로, 음식으로 먹는다면 얼마나 황홀한 경험일까. 하지만, 그렇게 사치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겁다. 말라 있는 정원에서 이렇게 강렬한 첫인사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 작은 꽃들이 온 마당에 봄이 왔음을 알린다.


크로커스는 내게 큰 깨달음을 준 꽃이다. 잔디를 정리하다 꽃밭 경계에서 수상한 풀을 발견했다. 평소 보던 잡초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아주 짙은 초록이었다. 잎맥도 노랗게 선명했다. 잎 모양은 뾰족하고 길다. 두께도 꽤 되어 튼실했다. 날씬하지만 힘이 느껴지는 모양새였다. 심상치 않아서 조심스레 파보았다. 조그만 마늘 모양의 구근이 달려 있었다. 신기했다. 큰 향나무 아래, 볕이 잘 들지 않는 자리였다. 향나무잎들이 떨어져 풀이 자라기 힘든 곳이기도 했다. 조심스레 캐내어 볕이 잘 드는 반대편 화단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 풀은 금방 시들어버렸다. 아쉬웠다. ‘초보 정원사가 그렇지 뭐...’ 나를 탓할 수밖에.


다음해 이른 봄, 그 작고 강한 싹이 나왔다. 어디에 심어 놓았는지, 내가 저런 것을 옮겨 놓긴 한 건지 잊은 상태였다. ‘이게 뭐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진한 순색의 꽃이 피었다. 너무 신기해서 탄성을 질렀다. 이렇게 아름다운 보라색이라니, 이렇게 샛노란 꽃술이라니! 새끼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구근이었다. 여린 풀이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생각했다. 추운 겨울바람에 땅이 꽁꽁 얼어붙어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녀석이 생명을 이어서 꽃을 피우다니. 아, 이놈들은 시간폭탄이었구나. 한 자리에서 온갖 것을 견뎌내고 응축한 에너지를 터뜨리는, 아름다운 시간폭탄이었구나.


식물이란 제자리에서 소리 없이 피고 지는 약한 존재인 줄 알았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의 힘을 받아 모은다. 보이지 않는 땅의 영양을 찾아 빨아들인다. 그것을 조금씩 몸 안에 차곡차곡 모은다. 인간은 알 수 없을 만큼 서서히, 하지만 단호하게 자란다. 모든 것을 태울 만큼 더워도 그 자리에서 참아야 한다. 홍수가 나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 칼바람이 불어도 도망갈 곳은 없다. 사람이라면 어디론가 숨어야 살아남을 시련들을 한자리에서 견딘다. 그렇게 모은 생명력을 한꺼번에 터뜨려 꽃을 만든다. 1년에 단 며칠, 짧은 시간 세상에 나를 알린다. 아무 때나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자연의 시간에 맞춰 꽃을 보여준다. 그것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딘다. 이처럼 강렬한 시간폭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집 크로커스는 첫 해 한 송이 꽃을 보여줬다. 이후 두 해를 더 건너 세 번째 봄, 가족이 생겼다. 꽃대가 하나 올라오는 듯싶더니, 이어서 또 다른 꽃대가 생겼다. 그리고 또 하나, 또 하나. 어느새 다섯 명의 가족이 생겼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대견했다. 모두 똑같이 시린 보라색 꽃잎과 샛노란 꽃술을 가진, 순색의 자태였다. 잡초인 줄만 알았던 작은 풀이 힘을 모아 가족이 되다니. 가슴 떨린 감동이 느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식구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지금도 크로커스는 하나 둘 꽃을 늘리며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자연의 시간 속을 뜨겁게 살아내고 있다. 추위가 남은 이른 봄, 꽃을 보여주는 크로커스는 내겐 작지만 가장 강한 친구다.





다음 친구는 헬레보루스입니다. 선을 넘는 애정(?)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꽃입니다 ㅎㅎ 다음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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