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이른 봄, 메마른 나의 정원이 부른다

by 묵PD
메마른 정원이 부른다.JPG


코끝 얼얼해지는 바람이 잦아든다. 구부정하게 걷는 등에 따스한 햇살이 드리운다. 그렇다. 어느새 매서운 겨울이 물러가고 있다. 아직은 완연한 봄이 왔다고 하긴 애매하다. 출근길 공기는 제법 시큰하다. 호기롭게 가벼운 옷을 입으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길거리 나뭇가지는 말라 있고, 마당 잔디도 아직은 누렇다. 그래도 참 희한하다. 햇살이 드리운 이른 봄 정원을 보면, 뭔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진다.


아파트에 살 때는 달력을 보고서야 계절이 가는 것을 알았다. 집안 환경은 늘 비슷하다. 베란다 밖 풍경도 크게 바뀔 것 없다. 그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읽기는 어렵다. 날이 가는 것은 머릿속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영하의 날씨가 풀렸다는 일기 예보를 듣고 날짜를 확인한다. ‘올해는 좀 빠르네.’ 혹은 ‘그렇게 춥더니만...’하는 소리를 삼킨다. 인간이 잘나서 그런 것일 테다. 편히 살기 좋은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 속에 안주한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보낸 세월이 어느 순간 허무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갔는지 모를 시간들이 쌓여 있음을 자각할 때다. 지난봄 무엇을 했던가. 여름은 어떻게 지냈던가. 가을은 풍성했나...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건 없다. 늘 따뜻한 집안에서 철없이 풍성한 식탁을 즐긴다. 변화 없이 안정된 일상이 흐른다. 그렇지만, 뒤돌아보면 헛헛하다. 늘 평안한데, 아쉽다. 내 마음이 덜 커서 그런 것일까.


정원이 있는 집은 다르다. 시간의 흐름을 오감으로 느끼게 된다. 봄이 오면 파란 잎이 돋아난다. 어떻게 그런 귀여운 색이 있을지 모를,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생명 가득한 연둣빛을 본다. 차가운 바람이 걷히면 겨우내 보이지 않던 새들이 날아든다. 누굴 만났는지 반갑게도 노래한다. 봄볕이 따뜻하게 살에 닿으면 여기저기서 꽃이 핀다. 초록이 깔린 캔버스에 눈이 시린 천연색이 뿌려진다. 즐거움에 다가가면 은은한 향기가 화려하다. 봄에 취해있다 보면 또 어느새 모든 생명이 충만한 여름이 온다. 태양의 힘이 꽉 들어찬 파란색으로 정원이 가득하다. 그렇게 더위와 싸우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면 다시 겨울이 온다.


자연의 시간은 엄격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초, 분, 시, 이런 단위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자연의 시간은 단위를 세며 기다려주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스스로 때를 알고 움직인다. 가장 적절한 순간에 그에 맞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싹을 내야 할 때를 놓치면 잎을 만들 수 없다. 잎이 나지 않으면 꽃을 만들 수 없다. 꽃을 피워야 할 때를 놓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한순간을 놓치면 그다음을 이어갈 수 없다. 엄격한 시간을 따르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꽃은 이 엄격한 시간 속에서 가장 화려한 때를 보여준다.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기다렸나 싶은,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낸다. 꽃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한껏 뽐낸다. 꽃이 핀 그 잠깐 동안 앞으로의 생명을 이어갈 씨앗을 만든다. 어쩌면 너무도 절박한 외침이다. 매미는 수년간 땅속에서 살다 단 며칠 나무에 오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를 남기기 위해 그렇게도 울어댄다. 꽃도 마찬가지다. 지난 추위에 살아남아 그다음 겨울을 이기기 위해 꽃을 보여준다. 그래도 인간의 눈에는 아름답기만 하다. 그만큼 처절해서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그만큼 아름다워서 엄격한 자연의 시간을 오래도록 견디고 살아남았을 것이다.


봄이 되면 정원의 꽃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짙은 보라색 꽃잎에 샛노란 꽃술이 예쁜 크로커스가 제일 먼저 필 것이다. 이어서 벚꽃이 피고 꽃비를 내려줄 것이다. 라일락이 마당에 짙은 향수를 뿌려줄 것이다. 영산홍이 색색으로 물들 것이다. 커다란 작약이 풍성한 아름다움을 자랑할 것이다. 담장에 노랗고 빨갛고 하얀 장미들이 드리울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자연에서 나온 인간도 이런 시간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정원 속에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깨닫는다. 아파트 안에서 무채색으로만 흘러가던 시간이 자연의 색으로 채워진다. 노랗게 말라 있는 정원이지만, 무언가 해야 할 일이 본능적으로 떠오른다. 꽃이 피어 있으면 그대로 아름답다. 하지만 꽃이 없어도 준비하는 동안 마음속에 함께 한다. 흘러가는 시간이 모두 의미를 가진다. 나의 소소한 노동이 자연의 도움을 받아 큰 기쁨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꽃을 바라보며 인간으로 사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에 다다른다.


이제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만날 때다. 지금부터 그 소중한 꽃 친구들을 하나씩 소개할까 한다. 나의 글이 부족해 그 아름다움을 다 전하지는 못 한다. 그 미진함은 사진으로 열심히 벌충할까 한다. 작년보다 더 풍성해진 꽃들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만나지 못할 친구도 있을 것이다. 올해 이곳 정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히 할 것이다. 하지만 더 큰 것을 자연이 해줄 것이다. 이른 봄, 멈춰 있는 것 같은 마당에 생명의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 메마른 정원이 나를 부른다.





다음주 첫 친구는 크로커스입니다. 자연의 힘과 아름다움을 단번에 깨닫게 해 준 아름다운 시간폭탄 이야기입니다. 25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샤프란 확대.jpg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