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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쓰 Oct 01. 2023

기화펜 러브레터 -10-

마음으로 작성한 고백편지

“시우야, 기다렸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그곳엔 민서가 서 있다. 꽃잎과 함께 그녀의 흑요석 같은 머리카락도 커튼처럼 일렁인다. 나는 지금까지 가장 믿을 수 있었던 두 귀를 의심한다. 기다렸냐고 묻는 그녀의 표현이 너무나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쪽지의 잉크는 이미 기화했을 시간이다. 내가 벚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전달될 리 없는 것이다. 나는 잠시 평정을 잃고 바로 본론을 묻는다.


“자습실에 있던 쪽지를 읽었어?”

“쪽지? 내 자습실 책상에 있던 건 그저 내용 없는 흰색 종이였어.”  


대답을 듣고 잠시 진정할 마음이 생긴다. 쪽지의 내용은 이미 기화한 건가. 마지막까지 용기 낼 수 없었던 나에 대한 운명의 벌칙이라고 받아들인다. 문방구 아저씨의 말을 듣고 조금 더 대담해질걸 후회한다. 하지만 다른 방면으로 생각하니 희망이 생긴다. 적어도 그녀가 자습실에 들렀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나와의 추억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일까. 그녀에게 직접 묻진 않아도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다. 나는 방금보단 차분하게 묻는다.


“그럼 그냥 집으로 가던 길인 거야?”

“아니, 쪽지의 내용은 제대로 읽었어. 기화 잉크는 사라지지만, 그렇게 힘을 줘서 눌러쓰면 자국이 남는다고. 햇빛에 비치니 잘 보이더라. 벚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는다는 내용이지? ”  

"....... 어, 맞아. 제대로 봤구나."


잠시 민서가 말한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과연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이다. 돌이켜보면 그 펜을 내게 준 사람도 민서다. 힘을 줘서 사용하면 자국이 남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다행이다. 잉크는 이미 기화한 상태였다. 하지만 마음을 담아 나도 모르게 힘을 줘서 글씨를 썼나 보다. 그 종이에는 활자 같은 자국이 새겨진 것이다. 덕분에 잉크가 기화가 되어도 내용은 민서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그 결론에 다다르자,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진다. 막상 그녀를 불렀지만 그 후로 무엇을 할지 생각해 둔 것이 없다. 심지어 그녀는 오지 않을 것이라 체념했는데. 고백을 글로 적는 것과 말로 전달하는 것은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나를 기다리는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그녀도 눈치챈 듯하다. 졸업식 날에 따로 부르는 것만으로 상황적 증거가 명확하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번 한다. 입학식 이후 내내 기다리던 순간이다. 막상 내 뜻을 전하려니 입이 열리지 않는다. 지금까지 노트에 작성했던 온갖 수식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럴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간결하게 내 마음만 전하기로 했다.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너를 처음 본 순간 좋아했어. 나랑 사귀어줘.”  

   

잠시 시간이 멈춘 기분이 든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뿐이었다. 그녀는 대답이 없다. 내 말이 그녀에게 닿긴 한 건가. 너무 긴장해서 나온 목소리가 그대로 바람에 날아간 것은 아닌가. 그녀의 대답을 예상할 수 없어 잠시 불안해졌다. 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그림자는 내 곁에서 멈췄다. 나는 이미 다른 행동을 할 여력이 없다. 그저 멍하니 민서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본다. 다음 오른손에 어떠한 감각이 느껴졌다. 민서가 옆에서 나와 손깍지를 껴버렸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그럼 우리 이제부터 커플인 거네.”

“난 내 마음을 담아 고백했는데, 직접 말로 답변을 듣고 싶어.” 

“이상한 곳에 집착하네.”

갑자기 그녀가 내 어깨를 잡고, 귀에 속삭였다. 

“잘 부탁드려요, 내 소중한 남자친구.”

나는 몸을 돌려 민서를 껴안았다. 

“앗, 손깍지 풀렸잖아!”

“그럼 손깍지 대신 포옹해 줘.”

그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를 껴안는다.

 

포옹하면서 그녀의 온기를 느낀다. 주변사람들이 이 장면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주변사람 덕분에 3년의 짝사랑이 이루어진 것을 실감한다. 내 품 안에 있는 민서를 끌어안아본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럽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찰나, 그녀는 나를 껴안은 상태로 말했다.


“우리 오늘 밤 데이트나 할까.”

“오늘 다른 친구들과 약속 있는 거 아니었어?”

“전화해서 바꾸면 되지. 오늘은 너랑 단둘이 있고 싶어.”

그런 말 들으면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알겠어. 나도 전화할게.”

스마트폰을 꺼내 상현이한테 전화한다. 

“상현아, 나 뒤풀이 못 갈 거 같다. 미안해.”

“엥, 방금까지만 해도 갈 수 있다고 했잖아.”

“여자친구랑 데이트 가야 해서 안 돼.”

전화 너머에서 상현이의 놀란 소리가 들린다. 

“뭐야, 민서도 안 오는 거냐. 커플끼리 재밌게 놀아라.”


그러고 전화는 끊겼다. 민서도 민정이와 연락을 마친다. 민정이의 분노는 전화기 너머 시우에게까지 들린다. 민서는 그녀를 달래느라 꽤나 고생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민서와 함께 후문으로 걸어가면서 데이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다른 생각을 한다. 만남부터 고백까지 3년이나 걸렸다. 참 오래도 걸렸다. 새벽의 러브레터는 분명 기화되어 날아갔을 터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에게 닿았다. 분명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서 썼던 행동의 결과일 것이다. 덕분에 내 고백은 전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인생에서 기화되지 않고, 이렇게 내 곁에 여자친구로 남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하겠지. 


“시우, 오늘 마침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어딘데? 지금 바로 갈까?”

“대화역. 예전에 이 거리에서 대화역 농담 했던 거 기억나?”

“아 그 하교하면서 했었던 썰렁 농담?”

“맞아, 아무튼 거기 근처에 새로운 쇼핑몰이 생겼다고 해. 졸업도 했으니 새로운 옷을 사고 싶어.”

그러고 보니 최근 상현이가 뉴스를 보며 말해준 것 같다. 

좋아, 그녀를 위한 졸업 선물도 사야지.

“그럼 바로 대화역으로 가자. 역까지 걸어갈까.” 


고백한 직후에 데이트라니 너무 설렌다. 역까지 가기 전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노트에 적었던 기화돼버린 러브레터다. 예전에는 그저 현실과 타협한 감정 소모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늘 러브레터의 예행연습이 되어주었다. 노트에 적었던 내용은 이미 쓰레기통에 있다.  


“민서야, 그거 알아?”

“아니, 몰라.”

“나 고백하는 연습 진짜 많이 했다.”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은 웃는 소리도 예쁘다.

“그거 어떻게 연습하는 거야? 벽에다 대고 했어?”

말하기 매우 어려운 방식이다.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연습했는데.

사실 매일 노트에 글을 썼다는 것을 말하기 엄청 부끄럽다. 

“비밀이야, 나중에 알려줄게.”

“뭐야, 알려줄 것처럼 말했는데 치사해.”


그런 노트가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언제 이 사실을 민서에게 말해줄 날이 올진 모르겠다. 후일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자는 생각만 한다. 지금은 다른 생각보다 민서가 곁에 있는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오늘은 그녀와 온종일 같이 있어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우리는 두 손을 잡고 학교의 후문을 지나간다. 마침 12시가 되어 학교 종이 울린다. 오늘만큼은 이 익숙한 멜로디가 나와 그녀가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행진곡처럼 느껴진다. 뒤에 있는 벚나무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마치 우리의 앞날을 응원하며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3년간의 짝사랑은 이렇게 학교생활과 함께 매듭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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