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허무해도 남기고 싶은 내 이야기.
교복을 입은 내가 집 현관에 들어섭니다.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으려 했지만 지금 내 몸은 무언가를 뱉어낼 여유가 없습니다. 현관문을 연 순간 제 입은 재갈이 물린 거처 닫히고 아주 잠깐의 위, 깊숙이 뚫린 구멍 두 개는 집안의 모든 걸 빨아댈 듯 들숨만을 반복합니다. 들숨의 맛을 본 폐가 멈추지 말라 채찍질 합니다. 들숨 한 번에 고개가 10도 한번 더에 또 10도 뒤로 젖혀집니다. 황홀합니다. 단단히 날 붙잡은 황홀을 온몸으로 흡수합니다. 폐는 부풀어 오르고 그럴 수록 가슴이 조여옵니다. 더는 들숨의 자리가 없는 폐가 백기를 휘날리자 그제야 스스로 물었던 재갈을 퉤 하고 뱉어내며 도취됐던 황홀경에서 빠져나옵니다.
엄마가 김을 굽는 날입니다. 엄마의 김은 마치 사랑을 쟁취하고자 하는 자의 ‘백전백승’ 구애의 도구와도 같습니다. 맛보기도 전에 냄새만 맡아도 취해버리는, 사람 홀리기의 명수입니다. 그날도 문 열자마자 마중 나와 있는 고소한 들기름 참기름 냄새와 그 밑에 깔린 약간의 비릿함 그리고 짠내까지... 그 앞에 나의 방어력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바닥을 보입니다. 엄마의 김은 향도 향이지만 끝을 향해 가는 과정도 꽤 볼만합니다.
네모반듯, 각 잡힌 투명한 비닐 직육면체 안에 까맣고 까슬한 김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엄마는 무심하게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수십 장의 김을 꺼냅니다. 서로의 몸을 부비며 내는 '바슬바슬' 김 소리에 그들의 파편이 검게 흩날립니다. 밖으로 나온 김은 이제 홀로 움직입니다. 반듯하게 뉘어진 까맣고 까실한 김에 슥삭 솔질하며 들기름 참기름 꼼꼼히 발라주니 언제 푸석였냐는 듯, 반질반질 윤이 나기 시작합니다. 숨죽이고 귀를 기울여 봅니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의 마찰이 느껴집니다. 김 위에서 손가락 마디들이 앞뒤로 위아래로 펼쳐질 때마다 흰 소금이 흩뿌려져 김의 모든 면을 파고듭니다. 그리곤 조심스레 한 장씩 들어 올려져 잠깐의 옆에 켜켜이 쌓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열기를 더할 것입니다. '딱 따닥 딱딱' 엄마의 쇠젓가락이 리드미컬하게 프라이팬에 부딪힙니다. 평소에는 프라이팬 코팅이 벗겨질세라 반드시 옻칠 나무젓가락을 쓰는 엄마지만, 김을 구울 때만큼은 언제나 딱딱거리는 쇠젓가락입니다. 그 소리가 싫진 않습니다. 프라이팬을 건드리는 젓가락 소리에 김은 뒤집혔다가 다시 제자리로 또 딱 소리에 뒤집혔다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불 마사지를 마친 김은 원래의 몸집보다 아주 살짝 아담해졌습니다. 유분기 하나 없던 까칠한 몸체에 반지르르 생기가 돌고 낯도 보는 방향에 따라 변하는 푸르스름한, 신비의 색을 띱니다. 열을 맞기 전, 입안에서 한참을 질겅이던 질깃한 김은 이제 살짝 닿기만 해도 바스락거리며 이내 녹아버립니다.
가족 모두가 애정해 마지않는 엄마의 김입니다. 잘 구워진 김을 잘라 반찬통에 꽉 채워 넣었습니다. 이제 언제든 원할 때 꺼내어 먹으면 됩니다. 밥솥에서 기차의 경적이 울리면 만날 수 있는 뽀얗고 윤기 나는 쌀밥에 엄마의 김을 올려 젓가락으로 말아들었습니다. 언제 먹어도 그 시작엔 아주 잠깐의 정적이 있습니다. 감탄 그리고 음미. 전국 각지에 제 아무리 김 굽기 장인, 명장이 있다 한들 난 엄마의 김보다 잘난 것을 보질 못했습니다. 짭짤하지만 아른아른 달큼하고 바삭한 첫 접촉은 금세 녹아내릴 듯 부드럽게 바뀝니다. 날숨에 날려 보낸 황홀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단, 그 황홀은 집에서만 완벽했고 밖에서는 반쪽짜리에 불과했습니다.
학교에서 김을 볼 때 나의 마음은 집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투명하고 반듯한 밀폐 용기 속에 가지런히 줄 선 나의 황홀한 김은 어디 갔을까요. 학교 점심시간, 나의 황홀한 아니 황홀했던 김은 OO쌈장 스티커가 붙여진 쑥색 쌈장통 안에 누워있습니다. 분명 엄마의 찬장엔 투명하고 예쁜 수많은 반찬통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늘 그들은 본체만체하고 내 도시락 가방에 쑥색 쌈장통을 쑤셔 넣었습니다.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 점심시간, 도시락 가방을 열면 다른 도시락 반찬통들과 조금도 섞이지 못하는 쑥색 쌈장통이 보였습니다. 쌈장이 아닌 김이 들은 쌈장통, 본래의 역할을 잃은 쌈장통, 예쁘지 않은 쌈장통, 조금은 창피한 쌈장통... 난 항상 그것을 보며 생각 했습니다. 저 쌈장통 뚜껑을 열고 황홀을 맛볼지 아니면 그대로 집에 가져갈지. 생각은 생각일 뿐. 쌈장통은 늘 책상 위에 올려졌습니다. 황홀을 이미 맛본 아이들의 손에 의해서. 친구들 눈에는 겉 껍데기일 뿐인 쌈장통 따윈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난 한 번씩, 황홀의 김을 만들었지만 또 그걸 쌈장통 안에 가둬버린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제발 그냥 반찬통에 넣어주면 안 되겠냐고, 정 싫으면 그냥 포일에 접어 넣어달라고. 하지만 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황홀한 김과 쌈장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요. 인정하기 싫었지만 쌈장통은 엄마의 김을 담기에 그 어떤 반찬통보다 딱 들어맞았습니다. 200G 쌈장통, 남는 여백도 거의 없을 뿐더러 어쩜 그렇게 알맞은 양이 쏙 들어가는지. 야속하게도 엄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엄마의 쌈장통 사랑은 좋은 표현으로 '한결' 같았고 내 입장에선 참으로 '지독'했습니다. 학창 시절 내내, 난 쌈장통 안에 있는 황홀을 늘 머뭇거리며 맞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교복을 벗은 지도 20년이 흘렀고 엄마의 김을 맛본 지도 오래입니다. 다른 음식은 잘도 해 주면서 김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김은 이제 안 굽나?"
"요즘은 다들 잘 나오더라. 사 먹어." 슬쩍 던진 말에 진한 박하향 대답이 날아왔습니다.
엄마의 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마트표 OO김을 엄마의 김 크기인 6등분으로 잘라 그토록 미워했던 쌈장통에 넣어봅니다. 지극히 평범한 맛의 김이지만 '딸깍' 200G 쌈장통 뚜껑이 열리는 순간 난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교복을 입은 내가 현관 밖에 서있습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순간 엄마의 손 끝에서 태어난 황홀한 김의 냄새가 나의 콧속을 간지럽힙니다. 몇 걸음 더 발을 떼면 부엌에서 김을 굽고 있는 엄마가 보입니다. 맞아요. 오늘은 엄마가 김을 굽는 날입니다.
이젠 압니다. 황홀은 어디에 있어도 황홀이라는 것을요.
커버이미지 출처 : 사진: Unsplash의Philipp Neumann
* 쌈장통,
지금 보면 크기는 도시락용으로 더할 나위 없고 색깔도 꽤 예쁜 것이다...
엄마 만세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