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가지 다름 안에는 손가락 사일 타고 흐르는 모래알만큼 작은 것도 있었고, 크기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다름도 있었다. 난 익숙한 듯 낯선, 제각각의 다름 속에서 살기 위해 유영했다. 매일매일이 롤러코스터에 탄 듯 어지러웠다. 맞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2024년은 '롤러코스터'였다.
겉핥기식으로만 봐도 다른 해와는 확실히 달랐다.다 끝나가는 올해를 되감아 보면 2024년 속에 살았던 난 생각보다 꽤 많이 지하철을 탔다(일정에 없던 외출이 꽤 많았다는 뜻이다). 지하철을 탔다는 걸로 다름을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 그것은 다름을 구분 짓기에 적합한 요소다. 손가락 다섯 개 정도의 지나간 해를 들춰봤더니 심지어 그중 몇 해는 단 한 번도 지하철을 타지 않은 해도 있더라. 올해는 나머지 해와는 분명히 뭔가가 달랐던 모양이다.
2024년 시작 무렵의 밤이다. 난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으로 갔다. 역 안에 들어섰고 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이름은 알리가 없고 얼굴은 흐릿한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탁구공처럼 핑퐁질을 자력 없이 해댔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마냥 어지러웠다. 내가 가만히 서있어 봤자 수많은 사람들이 내 옆을 좌에서 우, 우에서 좌, 앞에서 뒤, 뒤에서 앞으로 바삐 지나갔다. 토할 것 같은 어지러움, 고개를 들면 회색빛 천장에 노란 파도가 너울댔다.
눈꺼풀이 뒤집어질 것 같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숨도 가쁘다. 여름도 아닌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
이상하다. 저세상으로 가버릴 것 같은 몽롱함. 이 몽롱한 상태가 싫지만은 않다.
눈이 반쯤 풀린 상태로 목적지로 향했다. 다리의 움직임 역시 뇌로부터 비롯된 지능적인 움직임은 아니었다. 기계적인 발걸음,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정신 차려엇!' 귓가에 빨간 모자를 푹 눌러쓴 쓴 조교가 있는 듯했다. 우락부락한 손으로 내 뒷덜미를 채며 '정신 차리고 걸어라' 소리치는 그가 없었다면 입 밖으로 뭔가를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비록 헛것일지라도 그가 나타난 걸 감사히 여기며 반은 내 정신, 나머지 반은 신원미상의 네 정신으로 목적지로 향했다.
오랜만에 옛사람들을 만났다. 사는 곳이 다 제각각인데 날 위해 내가 오가기 편한 곳에 모임 장소를 마련해 준 사람들이다(못갈 거 같다는 핑계를 애저녁에 막을 심산이었던 거 같다). 그들은 내게 궁금한 게 많았다. 하지만 10년 만에 내 얼굴을 처음 본 것에 대해 그들 중 누구도 깊이, 함부로 묻질 않았다. 나 역시도 큰 말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밖에 안 나왔던 거지?"
한때는 역마가 낀 듯 밖을 돌아다녔던 사람인데, 이상하리만큼 두문불출했던 내게 10년 만에 묻는 말은 딱 저 말 뿐이었다.
하늘에 별이 박혀있고 달이 떠있을 때, 난 이 사람들과 함께 목 뒤로 달큰한 술을 넘겼다.
달짝지근한 하이볼은 밖에서 먹으니 더 맛이 좋다. 얼음 사이에 있는 뽀글뽀글한 물방울들은 어느 날의 다이아몬드처럼 내 혀 끝에서 빛났다가 이내 사라졌다.좋아하는 닭요리가 찜이며 구이며 꼬치며 한 가득인데 안주에 손이 가질 않았다.
한때는 낮이고 밤이고 지겹도록 말아먹어(놀랍게도 점심시간 때 종종 술을 만 적도 있었으며, 술을 만 사람은 회사선배였다 괴로웠다) 쳐다도 보기 싫은 소맥이 그날따라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이 소맥을 먹고 변기통을 부여잡고 잘 지라도, 한 잔만 더! 한 잔만 더! 탐하고 싶을 만큼. 얜 어쩜 이렇게도 한 입에 톡 털어먹기 좋을까. 익숙하지만 오랜 공백에 마치 처음 본 것처럼, 황금빛 소맥의 황금 비율에 감탄하며 몇 잔을 내리 비웠다.
1차가 끝나고 2차다. 앙증맞고 투명한 소주잔을 들어 내 잔을 채워달라 말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내가 소주를 즐기지 않았던 걸 기억하는 모양이다. 난 맑고 투명한 이슬을 수 백 방울 얻어내 입 속으로 흘렸다.
달구나. 달다. 왜 이렇게 달까. 왜 쓰질 않고 단 것이냐.
3차를 말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난 손을 흔들었다.
다시 지하철 역. 금요일 밤이라 지하철에는 여전히 사람이 바글댔다. 왔던 길이 생각났다. 큰일이다. 오랜만에 술도 마셨으니 정말 이러다가 내 입에 폭포가 있단 걸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의점으로 가 500ml 생수 하나를 얼른 샀다. 아... 술을 먹어 그런지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까끌한 병뚜껑을 몇 번 고쳐 잡고 손이 벌게졌을 때, 비로소 난 생수병에 술냄새나는 주둥이를 갖다 댈 수 있었다. 한 모금의 물은 입 안에 잠깐 머물렀다가 목구멍 뒤로 삼켜져 사라졌다. 종일 흐르는 것만 집어넣은 지라 찬 생수의 이동경로가 투명하게 느껴졌다.
저 아래 하이볼에서부터 소맥, 소주 그리고 병에 담긴 차가운 생수까지.
익숙하지만 새삼 낯선 것들이 내 안을 채웠다. 속이 시린 듯 뜨거웠다.
지하철 역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다. n차 약속에 늦은 사람, 귀가 시간을 넘긴 사람, 홀로 있는 사람도 무리 진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아까의 메스꺼웠던 기억을 상기하며 나름의 대비를 하며 바닥의 선을 따라 바로 걸었다.
비틀, 제자리, 비틀, 제자리...... 제자리, 비틀, 제자리, 비틀. 걸으면서 생각했다. 비틀이 비틀이 맞고 제자리는 제자리가 맞는지. 사실 비틀이 제자리였고, 제자린 줄 알았던 게 비틀은 아니었는지.
비틀이 제자리일 수도 있단생각에 어지럽고 메스꺼웠던 기분이 달아났다. 그 누가 비틀과 제자리를 명쾌하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흔들리는 발걸음과 넘실대는 생각,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사실 가지런한 발걸음과 셀 수 있을 만큼의 생각, 고요하고 편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무빙워크가 있다. 내 발걸음이 비틀거려도 제자리여도 그 걸음의 모습 그대로, 내 속도보다 빠르게 목적지로 데려다줄 무빙워크. 노란 파도가 너울 쳤던 회색 천장은 어느새 잔잔해졌다.
다 끝나가는 올해를 되감아 보면 2024년 속에 살았던 난 생각보다 꽤 많이 지하철 역에 갔다. 늘 손에 쥐고 있던 차키를 내려놓고 지하철 역으로 갈 때의 내 모습은 뭐라 말하면 좋을까. '들떠있다'. 이 말이 좋겠다. 지하철 역 안, 편도의 무빙워크라는 사소한 다름의 끝에는 늘 설레는 것들이 있었으니까.
나의 모습 그대로 조금은 빠르게 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속도로 목적지로 데려다줄 무빙워크. 난 이제 더 이상 지하철 역에서 구불거리는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는 반듯한 무빙워크만 탈뿐이다. 비틀대는 내 발을 온전히 느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어지러워 아래를 향한 내 머릴 세워 원하는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2024년, 난 지하철 역에서 롤러코스터가 아닌 무빙워크를 탔다.
2024년, 어지러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사소한 설렘들의 연속이었다.
2024년, 창백한 줄로만 알았는데, 다름을 쌓으며 새로운 걸 맞을 준비를 해 나간 찬란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