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허무해도 남기고 싶은 내 이야기.
하늘을 뒤덮고 있던 검은 먹물이 떠날 채비를 마쳤다. 창문 너머로 가냘픈 색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몸은 침대와 수평을 이루고 있다. 두 눈동자도 눈꺼풀 아래 숨어 밖이 어떤지 봤을 리 없지만 왜일까. 왠지 모르게 창문 너머의 색을 알 것만 같다. 그런 밖이 느껴질수록 잠들어 있던 정신도 서서히 깰 준비를 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람이 울리겠지. 날이 밝고 있어.' 깨어있는 내가 말하는 건지 자고 있는 내가 꿈속에서 말하는 건지 아직은 분간할 수 없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쳐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한 번도 걷은 일이 없는 내 이부자리는 내 몸뚱이의 일부분처럼 내게는 참 반갑다.
이상 < 날개 > 中
참 야속하지. 언제나 이불은 어둠이 막 걷히기 시작할 때, 그제야 내 몸에 꼭 맞아떨어진다. 이상, 그가 말한 이불은 한 번도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지만 내 이불은 주기적으로 자리를 이탈했다. 둘둘둘 걷어져 팡팡팡 털린 후 보그르르 거품에 적셔져 한참 빙글빙글 돌다 나오면, 접힌 살 안 쪽 깊은 곳에서까지 다우니향이 풍기는 것이다. 그런 이불을 어떻게 뿌리칠까. 빠져나올 수도 없어. 바로 지금이 그가 말한 절대적인 상태다.
첫 번째 알람을 맞이했다. '딴따딴따 딴따라라 따라따라 딴따라라~'. 미디 음원으로 듣는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은 바이올린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알람에 최적화된 <유모레스크>는 쨍하게 귓바퀴에 부딪히고 안쪽으로 파고들어 내벽을 긁는다. 익숙한 긁힘. 내 몸을 감고 있던 이불이 부스럭부스럭 사정없이 뒤적여졌다. 눈동자는 여전히 숨어있지만 이불과 베개 사이를 더듬는 양팔 그리고 그 끝에 손은 빠른 속도로 핸드폰을 찾아 알람을 다시 재우는 데 성공했다. 난 잠에서 깬 걸까. 아직 자고 있는 걸까. 의식이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첫 번째 알람은 갔다.
창문 너머에는 색이 피어오르는 것을 넘어 빛이 등장했다. 태양의 빛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온다.
'아, 이제 진짜 곧 일어나야 해.' 살짝 정신이 들면서부터 몸과 마음이 따로 놀기 시작한다. 홀로 초조해진 마음은 구석에서 소심하게 쿵쿵거렸고 그와 달리 열 개의 발가락은 여전히 이불속에서 느긋했다.
10분이 지나고 데자뷔. '딴따딴따 딴따라라 따라따라 딴따라라~'. 두 번째 알람이 들렸다. 침대 위의 핸드폰 좌표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짧게 팔을 뻗었다. 곧바로 알래스카의 불곰이 연어를 낚아채듯 거칠게 핸드폰을 움켜쥐었고 소리와 진동을 빠르게 떠나보냈다. 구석에 있던 심장이 조금씩 앞으로 나올 준비를 하는지 쿵쿵이는 소리가 아까보다 크게 들렸다. 이제 하나 남았어.
매일 반복되는 큰일이다. 분명 좀 전까지 깨어나고 있던 정신은 어디로 가버렸나. 마지막 알람을 남겨놓고 모든 게 흐리멍덩해졌다. 부스럭거리던 이불은 잠잠해졌다. 가던 길 멈추고 되돌아온 '절대적인 상태'가 이불과 내 몸을 다시 하나로 만들었다.
소란한 알람 전쟁 두 번에 결국 전사한 걸까.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난 다시 얕은 잠에 빠졌다. 세 번째 알람이 울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알람은 한참을 혼자 떠들다가 자멸했다. 방 안은 휘휘 콧바람 소리로 가득 찼다. 마지막 알람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콧바람의 주인인 난 알 리가 없다.
그날의 알람은 영영 가버렸고 잠시 후, 이불에서 번개 치는 소리가 나면서 난 화장실로 달렸다. 머뭇거릴 여유도 없다. 난 곧바로 칫솔을 잡고 치약을 부욱 짜고선 연신 입안을 훑었다. 게거품을 문 듯한 입으로 '어쩌지. 시간이 너무 타이트하다. 늦으면 안 되는데, 지각 아니겠지. 왜 맨날 마지막에 이러는 거야. 대체 왜!'라며 중얼거렸다. 아침 루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의 매일 하는 말을 난 또 했다.
20분쯤 걸렸으려나. 머리카락이 조금 덜 마르긴 했지만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는 아니니 괜찮다. 난 모든 준비를 거의 완벽하게 마치고 현관을 나섰다. 놀랍고 신기해. 출근 시간, 등교 시간에 '혹시 내가 초능력자가 아닐까?'라는 망상을. 살짝 슬로 걸린 세상 속에서 나만 빨리 감기로 움직이는 걸 느낄 때, 난 묘한 쾌감에 젖었다.
'이 정도면 지각은 면할 수 있겠다'라는 희망에 부푼 상태로 드디어 출근길에 들어섰다. 이상하다. 매일 다니는 거린데 낯선 기분. 출근길 직장인, 등교하는 학생도 없다. 나 시계 잘 못 본거 아니야?!?! 손목에 있는 시계도 보고 핸드폰 시계도 보고 주위도 봤다. 이마에 '나 굉장히 바쁨' 포스트잇 붙이고 다니는 아침 사람들이 다 어디 간 거지. 불안하다. 그나마 길 위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왜 느긋한 걸까. 그러다가.
토요일, 토요일이다. 그냥 토요일 아니고 쉬는 토요일이다. 휴일이라고. 나 안 늦었다고!
서두를 수 있는 기회의 알람을 내리 끄며 게으름 부린 나를 채찍질했다. '대체 언제까지 그럴 셈인가' 말하며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늦은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이틀이나 빠르게 나선 거였어. 간당간당할지라도 언제든 나갈 준비가 되어 있던 거야. 늦은 게 아닐지도 몰라. 뿌옇고 몽롱한 잠에서 깨기만 하면 난 언제든 튀어나갈 수 있었어.
난 쭉 예열 상태였어.
커버이미지 출처 : Arthur Brognoli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3343625/
*기대되는 20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