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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김치

by 책방별곡

손끝에 깃든 노련함으로, 마늘을 다지고, 청양고추를 송송 썬다. 통깨를 볶아 식히고, 진간장과 멸치액젓을 비율 맞춰 섞는다. 그리고 그 양념을 고루 입혀 켜켜이 쌓아가는 깻잎—그녀의 여름은 그렇게 시작된다.

깻잎김치. 그건 누군가에겐 반찬 한 접시겠지만, 그녀에겐 하나의 의식이다. 아니, 어쩌면 사위를 위한 애정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장모님~ 저 올해도 그거… 해주시는 거 당연하죠?”

사위는 초여름,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몰려오기 전, 슬쩍 눈치를 보며 말한다. 키는 크지만 마음만은 열 살 아이 같은, 철없는 막내 스타일의 사위였다. 애교가 많아 가끔은 딸보다도 귀엽다.

“그거? 뭐 말하는데?” 그녀는 알면서도 묻는다. 사위는 기다렸다는 듯, 배시시 웃는다.

“그 깻잎김치 있잖아요. 장모님 솜씨가 진짜 최고 아닙니까. 그거 하나면 밥 두 공기 뚝딱입니데이.”

뭐 하나 대단할 것 없는 깻잎김치인데, 사위는 매년 여름이면 꼭 잊지 않고 물어온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심지어 첫해엔 혼자 몰래 김치통 뚜껑을 열었다가, 양념 손에 묻히고는 혼나기도 했다.

“그렇게 좋으면, 아예 처가살이 좀 와서 같이 해보던가?”

“장모님. 전 손이 커서요. 깻잎 한 장도 찢을까 봐 무서워용.”

“참 네, 말은 잘한다…”

사위와의 대화는 언제나 이렇다. 유치하지만 미운 말이 없다. 그가 애교를 부릴 때면, 잠시 고된 세월이 사라지는 듯하다. 그녀의 마음속 어디쯤에서 아들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하다.

깻잎김치를 만들기 위해 장을 본 날, 그녀는 늘 같은 시장을 찾는다. 낡은 채반에 소복이 쌓인 깻잎을 만져보며, 잎맥이 선명하고 얇은 것을 골라 담는다. “이건 사위 줄 거라 더 신경 써서 주이소.”라는 말에, 시장 아주머니는 깔깔깔 웃는다.

“사위가 뭘 그렇게 잘하는데? 장모님이 매번 만들어주노?"

“그냥… 말이라도 예쁘게 하잖아요. 그게 다지얘.”

‘말이라도 예쁘게.’ 그녀는 가끔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살면서 많은 관계가 스쳐갔지만, ‘예쁜 말’로 서로를 대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위는, 아무리 허술하고 철없어 보여도, 늘 웃는 말씨로 그녀를 대했다.

양념장을 만들 땐 그녀만의 비밀이 있다. 진간장과 액젓의 황금비율은 말할 수 없다. 마늘은 푹 익은 걸 쓰지 않고 생마늘을 쓴다. 매콤하면서도 향긋하게, 깻잎 사이사이에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양념을 넣어야 한다.

그걸 보면, 남들은 힘들겠다 말하지만, 그녀에겐 위로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음식을 만드는 일은, 그 사람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일이다.

“사위가 깻잎김치 좋아하니까, 나도 특별히 더 정성을 쏟게 되네.”

자신에게 중얼이며 손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완성된 김치를 통에 담아 냉장고 맨 아래칸에 넣는다. 가장 시원하고 조용한 자리에.

며칠 후, 사위가 딸과 함께 들른 날.

“장모님~저 왔어요~ 혹시, 혹시~?”

“아니 아직 뚜껑도 안 열었는데 우째 아노?”

“에이~ 그 냄새가 나잖아요. 제가 장모님 깻잎김치 귀신입니다, 귀신.”

딸이 옆에서 “우리 엄마 힘들게 하지 마~”라며 타박을 해도, 그는 태연하다. 도리어 손수 밥그릇을 꺼내 들고는 김치통 앞에 앉는다.

“아… 이거죠, 이 맛이죠…”

입안에 깻잎으로 싼 밥을 넣고 눈을 감는 그의 모습은, 뺀질뺀질 능청스럽다. 그걸 보며 그녀는 어이없어 웃다가도, 괜스레 뿌듯하다.

“장모님, 저 진짜 이 김치 하나면요, 여름에 입맛이 싹 살아나요.”

“그럼 우리 딸이랑 싸우지 말고 잘 살아, 그것만 잘하면 매년 해줄게.”

“장모님~저처럼 잘하는 남편도 없어요~!”

밤늦게 돌아간 부부를 보내고 그녀는 부엌에 남는다. 그릇을 닦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만든 음식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기다려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세월은 어느새 그녀를 엄마에서 장모로, 여인에서 어른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여전히 음식 앞에서는 한 사람의 마음을 담는 연습을 한다. 정성이라는 것은, 결국 손끝보다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그녀는 다시 깻잎 한 장을 꺼내어, 양념을 묻혀본다. 혹시나 일주일 뒤 또 들릴지도 모르는 그 철없는 사위를 위해서.

“또 주세요, 장모님.”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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