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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적당히 선 긋는 연습이 필요하다

품격 있게 거절하는 방법

by 최지현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하지만 매번 자리를 양보하느라 몇 정거장을 서서 가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처음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왜 저 사람은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걸까?


거절이 없는 관계는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다

모든 요청에 "네"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언뜻 보면 이보다 좋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위해 행동하는 걸까? 사실 그는 나를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내가 "괜찮아, 네가 힘들면 안 해도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지 않는다. 내게 판단력도, 배려심도, 상황을 읽는 능력도 없다고 전제한다.


더 교묘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를 희생자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렇게 다들 도와주는데 아무도 나는 도와주지 않아"라며 은근한 죄책감을 유발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거절할 권리를 빼앗아버렸다. 진정한 관계는 상호성에서 나온다. 서로 줄 때도 있고 받을 때도 있고, 도울 때도 있고 거절할 때도 있어야 한다.


거절당할 권리, 거절할 의무

역설적이게도, 상대방을 진짜 존중한다는 것은 그에게 거절당할 권리를 주는 것이다. "당신도 나처럼 자신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니,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그럼 당신이 결정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나 역시 거절할 의무가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도와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히려 거짓말이다. "진심으로 돕고 싶어서" 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거절하기 싫어서" 하는 것이니까. 이런 거짓 관계가 쌓이면 둘 다 지친다. 도와주는 사람은 번아웃에 이르고, 도움받는 사람은 점점 더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건강한 관계의 시작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 지금 도울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판단하는 것. 이것은 현실 감각이자 자기 존중이다.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필요한 순간에 최고의 도움을 줄 수 있다.

무엇보다,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은 신뢰할 수 있다.

"이 사람이 된다고 하면 정말 되는구나"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안 되는 상황이구나"

이 말들이 오히여 나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준다. 반면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거나, 마지못해 하는 티를 내거나, 엉성한 결과를 낸다.


거절하는 방식이 관계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절의 '기술'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거절을 상대방을 교육하는 기회로 보라. "앞으로 이런 식으로 부탁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또는 "이런 상황에서는 미리 말씀해 주시면 도울 수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담아서 말하는 것이다.


단, 상처 주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거칠게 거절당한 사람은 위축되어 다음에 정당한 도움이 필요할 때도 부탁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 정중하게 거절당한 사람은 "아, 다음에는 이렇게 해야겠구나"라고 배운다.

좋은 거절은 상대방이 다른 사람들과도 더 건강한 관계를 맺도록 돕는다. 나 하나만을 위한 거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간관계 전체를 위한 거절이 되는 것이다.


'적당한 선'을 지킬 때 생기는 진짜 친밀감

역설적이게도, 명확한 경계가 있을 때 더 깊은 친밀감이 가능하다.

"나는 여기까지 할 수 있어요"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주면, 그 안에서 주고받는 것들이 더 소중해진다. 받는 사람은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해하며, 주는 사람은 억지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줄 수 있다. 경계 없는 관계는 사실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의존이거나 착취다. 서로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이런 관계에서는 거절도 자연스럽다.


"지금은 어렵지만 다음에는 도와줄게"

"이 부분은 내가 잘 모르니까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좋겠어"


이와 같은 말들이 서로를 배려하는 표현이 된다.


'아니요'라고 말할 용기

우리는 모두 "아니요"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이기적인 권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다. 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기만이며 폭력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 진정한 관계를 맺을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며, 나의 거절로 인해 이 관계가 끝날 것이라고 혼자 단정하는 것이니까.

다음에 거절해야 할 상황이 오면, 죄책감 대신 이렇게 생각해 보자.


"지금 나는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선택을 하고 있다. 나를 위해서도, 상대방을 위해서도."


그것이 진정 어른다운 방식이다.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 안에서 진짜 의미 있는 것들을 주고받는 것. 그런 관계에서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가능하다. 거절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더 진실한 관계의 시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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