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이직보다 현 직장에서 인정받는 게 빠를 수 있다
30살, A4용지 1장으로 연봉협상에 성공했다.
흔히 연봉 점프업은 이직으로 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30살 때, 나는 한 번도 이직하지 않고 연봉을 1000만 원 올린 적이 있다. 비법은 간단했다. A4용지 1장에 내 성과를 정량화해서 보여주고, '내가 대표라면 어떤 사람에게 돈을 더 주고 싶을까?'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위기가 기회가 된 순간
그 해 여름, 우리 팀에서 핵심 멤버 한 명이 갑자기 퇴사했다. 팀장이었던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반적이라면 빠르게 새 사람을 채용해서 헤드카운트를 채우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다른 길을 택했다.
"대표님, 새 사람을 뽑는 대신 우리 팀 업무 시스템을 완전히 효율화해 보겠습니다. 밀도 있게 제대로 된 사람 한 명을 뽑아서, 기존 2-3명이 하던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만들어보겠습니다."
사실 이건 도박이었다. 실패하면 팀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 팀의 업무 프로세스에는 분명 군더더기가 많았고, 그걸 정리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6개월 동안 나는 미친 듯이 일했다. 기존 업무 프로세스를 전부 뜯어고치고, 중복되는 업무를 통합하고, 자동화할 수 있는 부분은 시스템화했다. 그리고 정말로 뛰어난 사람 한 명을 채용해서, 기존 팀원들과 함께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결과는 놀라웠다. 인건비는 절약되었고, 그 돈을 마케팅 비용으로 더 투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팀의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매출 성과가 2배 이상 증가했다.
A4용지 1장의 마법
연말이 되자 나는 확신을 가지고 연봉협상을 준비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른 회사에서는 내 연차면 얼마를 받는다더라" 같은 이야기는 대표님 입장에서 전혀 와닿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A4용지 1장에 내 성과를 정량화했다. 인건비 4천만 원 절약, 매출 2.1배 증가, 업무 효율 40% 개선 등 구체적 숫자들로 채워진 한 장의 보고서였다. 감정이 아닌 데이터로 내 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제가 올해 회사에 기여한 가치가 이 정도라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고 싶습니다. 연봉 1000만 원 인상을 제안합니다."
대표님은 A4용지를 찬찬히 읽어보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숫자가 모든 걸 말해주네요. 승인합니다."
내가 대표라면? 사고방식의 힘
그때 깨달았다. 연봉 인상의 핵심은 '내가 대표라면?'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대표는 직원 개인의 사정이나 감정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회사에 얼마나 기여하느냐, 투자 대비 얼마나 수익을 가져다주느냐에만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연봉 협상도 그 관점에 맞춰서 접근해야 한다.
나를 잘 모르는 새로운 회사가 나에게 20-30% 높은 연봉을 제시할 때, 그들이 기대하는 건 명확하다. '비싼 돈 주고 모셔온 만큼 빠르게 성과를 내라'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고 성과를 내기까지는 최소 6개월이 걸린다. 그 기간 동안은 회사 입장에서 손해다.
반면 현직장에서는 이미 내 능력과 성과가 검증되어 있다. 회사도 나에 대한 투자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있다. 훨씬 안전한 투자인 셈이다. 더 중요한 건, 현직장에서는 내가 만든 성과를 정확히 수치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직할 때는 "이전 회사에서 이런 성과를 냈습니다"라고 말해도 검증하기 어렵다. 하지만 현직장에서는 모든 게 투명하다.
이직의 숨겨진 리스크들
이직으로 연봉을 올리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리스크가 따른다.
우선 프로베이션 기간이 있다. 보통 3-6개월 동안은 언제든 해고가 가능하다. 높은 연봉으로 입사했기 때문에 기대치도 높고, 기존 직원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저 사람 얼마나 받길래?"라는 속삭임 속에서 빠르게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상당하다. 게다가 이직을 반복할수록 "또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회사에서는 장기 프로젝트나 중요한 역할을 맡기기 꺼려하고, 다음 이직에서는 더 불리해진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 이직으로 연봉을 올린 친구들 중 상당수가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후회의 말을 했다. "면접 때 들은 것과 완전히 다르다", "조직 문화가 맞지 않는다", "차라리 예전 회사가 나았다"는 푸념들이었다.
현직장 연봉 올리기의 핵심
내 경험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성과를 숫자로 증명하고, 대표 관점에서 협상하라. 팀원이 퇴사했을 때, 나는 "사람을 더 뽑아달라"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효율화로 더 큰 성과를 내겠다"라고 제안했다. 그 결과를 구체적 수치로 보여줬고, 연봉 인상이 회사에게도 이익이 되는 투자라는 점을 증명했다. 감정이 아닌 데이터로, 개인 사정이 아닌 회사 기여도로 말한 것이다.
나무와 함께 자라는 법
30살에 연봉을 1000만 원 올린 후, 나는 더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고, 더 좋은 조건으로 다른 회사에 이직을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설익었을 무렵, 무작정 이직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면,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정말 현직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봤나?"
만약 답이 '아니요'라면, A4용지 1장과 '내가 대표라면?' 사고방식을 가지고 한 번 더 도전해 보라.
그 열매는 생각보다 달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