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찾아가는 길
섬진강변을 찾아간 것은 남도에 벌써 봄이 와 매화(梅花)가 한창이라는 유혹 때문이었다. 그 옛날 *길상이가 거닐던 아름다운 섬진강변을 따라 이제 매화꽃에 마음껏 취해 볼 일이다.
매화를 사랑하기로는 퇴계 이황 선생이 그토록 사랑했다고 전한다. 평소 매화를 가까이 두고 아꼈지만 심지어 세상을 떠날 때 선생의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가 그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했다 하니 선생의 매화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 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선생의 14대 후손이며 시인이었던 육사(陸史)의 본명은 <이원록>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당시 감옥의 ‘수인번호 264번’에서 육사의 호가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더구나 멀리 이국땅 베이징 감옥에서 끝내 숨이 졌다고 한다.
육사 <광야(廣野)>의 시에,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하는 구절이 있다.
‘매화 향기’를 하필이면 왜 ‘아득하다’고 표현했을까? 듣기로 매화 향기를 ‘나라의 독립’이라고 보고 그 해방이 언제 이루어질지 그저 알 수 없는 ‘아득한 먼일’로 여겨 그렇게 표현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미루어 생각하기로 시인이 멀리 이국땅 베이징 감옥에 갇혀 있을 당시, 어느덧 추운 겨울 가고 봄이 올 무렵 고국 남녘에는 이미 따스한 봄은 왔을 것이고 가볼 수 없는 고향 들녘에 흐드러지게 피었을 매화를 얼마나 그리워했겠는가. 그리고 추운 이국의 감옥에 갇혀 그 ‘매화 향기’를 미루어 생각한다는 것이 그저 아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2. 돌아오는 길
이제 마음을 달래며 매화 향기 아득한 섬진강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그런데 뜻밖에 ‘정병욱 가옥’을 찾아가게 되었다.
시인 윤동주는 졸업을 앞두고 1941년 ‘서시(序詩) 등을 직접 필사한 창작 시집’ 3부를 만들어 그중 한 부는 스승인 이양하선생께, 본인이 한 부, 마지막 한 부를 연희전문학교 동기이자 당시 함께 하숙하던 정병욱 친구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필사본이 유일하게 남겨져 세상에 알려졌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섬진강변, 광양 정병욱 본가에까지 연관되어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그 후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독립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협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1945년 해방되던 해, 2월 16일 29세의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안타깝게 순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윤동주 소장본은 찾을 수 없었고, 스승 이양하선생님께 맡겼던 시집도 해방 등 격변기에 역시 소멸되어 전해지지 않았다.
이제 세상에 남겨진 것은 오직 친구 정병욱에게 맡겨졌던 ‘서시(序詩)’ 필사본 한 부뿐이었다.
그런데 친구 정병욱마저 1944년 1월 일본군 징용으로 끌려가게 되어 생사를 기약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고향인 전남 광양 본가에 계시던 어머니께 윤동주의 마지막 남은 필사본 원고 보존을 부탁했다.
정병욱이 징용을 떠나며,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꼭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라고 유언처럼 남겼다고 한다.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마룻장 밑에 간직(외동 누이동생 정덕희여사 증언)해 두었던 동주의 시(詩)를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정병욱에게 온전히 넘겨주었다고 한다.
정병욱은 연희전문 동기이자 시인인 친구 강처중과 함께 ‘유고(遺稿) 31 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음사에서 간행(1948)하였고, 이로써 어둠에 묻혀 있던 윤동주의 시혼(詩魂)이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정병욱은 국문학자로도 잘 알려졌지만 자기의 삶에 있어 가장 큰 보람된 일은,
“동주의 유고 시(詩)를 잘 간직하였다가 세상에 널리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술회하였다.
마음이 끝도 없이 가라앉을 때, 나는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조용히 읊조린다.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길상 : 박경리 소설 『토지』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