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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문식 Sep 30. 2020

요양병원 이야기

요양병원에 있는 부모는 딸 하나가 열 아들보다 낫다

누구나 요양병원을 방문해 보면 마음이 어둡다. 그곳에 계신 분들은 집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가족들은 여기서 조금 더 있으면 집에 가게 해주겠다고 대답한다. 맞벌이는 맞벌이하느라 바빠서, 전업주부도 이런저런 이유가 따로 있다. 그곳에 계신 분들은 집에 가고 싶지만, 가족마다 상황이 조금 더 좋아지면 집에 간다고 말한다. 서운한 얼굴을 뒤로하고 나오는 가족들은 눈물만 흘린다. 


맞벌이하는 부부는 거동이 불편한 부모를 화장실에 데려가고, 점심밥을 차려 주고, 기저귀를 갈아 줄 수가 없다. 그래도 요양병원에서는 간병인이 그 모든 것을 대신하여 줄 수 있으니 병원에 계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삶의 기준도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70대는 건강하면 성공한 것이고, 80대는 본처가 밥을 차려 주면 성공한 것이며, 90대는 전화할 곳이 있으면 성공한 삶이다.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어떤 의사가 한 말이다. 그 의사는 요양병원에 면회 온 사람들이 서 있는 가족들의 위치를 보면 촌수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침대 옆에 바싹 붙어 눈물 콧물 흘리면서 이것저것 챙기는 여자는 딸이다. 그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남자는 사위다. 문간쯤에 서서 먼 산만 보고 있는 남자는 아들이고, 병실 복도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여자는 며느리다. 요양병원에 장기 입원하고 있는 부모를 그래도 이따금 찾아가서 살뜰히 보살피는 사람은 딸이다. 그녀는 준비해 온 밥이며 반찬이며 죽이라도 떠먹인다. 대개 아들들은 침대 모서리에 잠시 걸터앉아 딸이 가져온 음료수 하나 까먹고 이내 사라진다. 요양병원에 있는 부모는 딸 하나가 열 아들보다 낫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과 끝이 중요하다. 더할 나위 없이 사람의 생도 탄생과 죽음이 중요하다.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은 소중한 사랑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것’이고 자신과 맺었던 모든 관계를 끝내고 빈손으로 간다.     


어느 노인이 요양병원에서 보낸 편지다. 

‘열심히 살 때는 세월이 화살 같다고 하지만 할 일이 없으니 세월이 가지 않네요. 정신이 맑으면 무엇하리오, 자식 많은들 무엇 허리요, 보고 싶은 마음만 더 하네요. 차라리 정신 놓아 버린 저 할머니처럼 세월이 가는지, 자식이 왔다 가는지 자식을 보아도 몰라보시고 그리움도 사랑도 다 기억에서 지워 버렸으니 천진난만하게 하루 세끼 밥이 유일한 낙입니다.’    


이 편지를 보면 돈 없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거동이 불편한 부모가 되면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부모다. 그들은 친구가 있어도 마음을 나눌 수 없다. 요양원에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 함께 산다. 정신이 맑은 노인이 그 속에 함께 있으면 더 외롭고 하루가 더 길다.     


요양원의 시간은 겉으로 그저 덤덤하게 흘러간다. 

외로움 속에 해가 뜨고 지는 것조차 상관하지 않는다. 

날짜의 개념도 없이 지루한 침대에 외로움을 의지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그리운지 말도 없다.

그저 살아 있음에 살아 있는 침실이다. 

계절은 기다리지 않아도 비가 눈으로 바뀐다.     


이들의 삶은 무엇인가? 

슬픔의 감각도 이별의 아픔도 없다. 

지나온 인생을 후회하며 출입문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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