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정신과 긴장한 몸을 위해
몸이 찌뿌둥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자전거를 타든, 산책로를 달리든, 헬스를 하든 몸을 조이고 긴장을 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산에 오르기로 했다. 등산은 주로 아빠와 함께했지만, 오늘은 나 혼자.
우리 회사는 내게 참 편하고 좋은 환경을 가졌다. 우리 집에서 출발하는 지하철 덕분에 출근길엔 항상 앉아서 가고, 공유 오피스인 위워크에 입점해 있는지라 나의 동선을 최적화해주는 환경에서 일하고, 점심은 주로 배달해 먹어서 밖에 나갈 일도 별로 없다.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지만, 내 몸은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아서 어딘가에 취해있는 듯 붕 뜬 느낌이었다. 몸이 긴장하고 정신은 맑아야 할 텐데, 반대로 정신만 잔뜩 긴장하고 몸은 어딘가에 붕 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몸이 불어서 터져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에, 몸을 풀러 도봉산으로 향했다.
삼사 년 전쯤엔 아빠와 가끔 도봉산에 올랐다. 혼자 있길 좋아하는 우리 부녀가 유일하게 같이 하는 취미였다. 그렇다고 매주 올라간 건 아니고, 아빠가 이삼 주에 한 번씩 등산할 때 내가 따라가고 싶으면 가는 정도였다. 그땐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였으니, 대화의 주제는 대학생활이나 진로였다. 난 가족에게 시시콜콜하게 모든 생활을 털어놓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그중에서도 아빠와는 굳이 수다를 떨진 않아서 아빠가 내 이야기를 오래 듣는 유일한 장소가 도봉산이었을 것이다.
도봉산역에 내렸다. 먼 길을 한 번 눈으로 훑고,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봉산은 초입이 유난히 길다. 역에 내려서 흙을 밟기까지 적어도 삼십 분, 길면 사십 분까지 걸린다. 아마도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드느라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아빠와 함께일 때는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혼자여서 그런지 초입부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40대, 50대를 겨냥한 패키지여행 소개 팜플렛이 잔뜩 붙어있는 게시판, 형광색 등산복을 파는 등산복 가게들, 아빠와 내가 항상 들러서 정상에서 먹을 김밥을 사던 식당, 얼음물을 파는 세븐일레븐.
드디어 흙을 밟았다. 본격적인 등산. 다들 누군가와 함께인데 혼자 걷는 게 처음에는 조금 민망했다. 그냥 나에게 집중하고 싶었던 시간이라 아침 일찍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싫었고. 산 중턱을 넘고 나서부터는 주변에 가득했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라졌다. 나도 헉헉거리면서 산에 오르는 것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매일 들여다보는 모니터 때문이 뻐근해진 눈에 푸른 나무를 담아 정화시키고, 피톤치드 향을 집까지 가져가고 싶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규칙적으로 무릎을 굽혔다 펴며 꾸준하고 부지런하게 산을 올랐다.
아빠와 나는 항상 자운봉을 올랐다. 오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너무 오랜만인 나머지 길을 잘못 들어서 영 다른 길을 올랐다. 나중에 보니 내가 올라간 곳이 '거북바위' 쯤이겠다, 싶었다. 포토제닉한 풍경을 보지 못해서 더 오르고 싶었지만 너무 무리하고 싶지 않아서 자제했는데, 막상 다음날이 되어도 근육통이 오거나 하진 않았다. 다음 등산은 자운봉을 목표로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처음 혼자 오르는 산행에 가보지 않은 길을 다녀오다니. 꽤 뿌듯했다.
혼자 등산하면 평소에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말소리가 들린다. 친구들끼리 온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이 허세 섞인 말투로 누군가를 욕하는 대화, 함께 온 커플이 서로를 챙겨주는 말소리, 부부 동반으로 등산을 온 사람들끼리 내려가서 무얼 먹을지 하는 고민, 내가 어렸을 때처럼 딸을 데리고 온 아빠의 재촉거림. 음악을 들으면서 오르내리려고 했는데, 자연의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음악보다 더 즐거운 소리였다. 혼자서 하는 등산도 좋지만, 다음에는 꼭 누군가와 함께 오리라, 생각했던 하루였다.
2018년 6월 17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