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이죽거리는 얼굴을 보자 내 마음에도 빨간 무엇인가가 샤프로 터트린 물풍선처럼 울컥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날씨는 적당히 선선했던 것 같고, 난 어김없이 교실 맨 뒤 내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업을 듣고 있었다. 고작 열 살, 친구들과 한창 재잘대며 뛰어놀 나이라곤 하지만, 유독 내성적으로 태어난 데다가 선택적 함구증까지 앓고 있던 그 시절의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 외에는 별달리 하는 것이 없었다.
그즈음 내 짝꿍은 꽤 덩치가 있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애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치켜뜨는 게 습관이었고, 반 친구들과 장난이랍시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일상인 아이였다. 꼭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유바바의 덩치 큰 아들을 꼭 닮은 아이였다.
그 아이는, 심심할 때면 나를 때렸다. 일과시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괜히 툭툭 한 마디씩 건넸다. 내가 대꾸를 못해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늘 불끈 쥐고 있던 주먹을 힘차게 쳐들었다. 그 주먹은 언제나 내 자그마한 배 한복판에 이유 없이 꽂혀들어왔고, 난 힘없이 교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럼 같은 반 아이들은 교실 맨 뒤에서 일방적으로 때리고 맞고 있는 우리 둘을, 영화 보듯 슥- 둘러보고 나서 다시 자기 할 일을 하곤 했었다.
그날은, 그 아이가 내 앞에서 내 필통을 뒤적거리며 나를 놀려대고 있었다. 내 볼펜 하나하나를 내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달라고 해봐~", "뺏어봐? 못하겠지?" 하고 이죽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 필통에서 빨간색 몸통에, 끝부분은 투명한 유리로 덮여있는 샤프 하나를 휙 들고, 사물함 뒤편으로 던져버리곤 말했다. "뺏어봐! 못하겠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빨간색 샤프였다. 이 개새끼가 진짜...그놈의 이죽거리는 얼굴을 보자 내 마음에도 빨간 무엇인가가 샤프로 터트린 물풍선처럼 울컥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아아아!"
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눈에 보이는 대로 내 눈앞에 있는 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앞뒤로 사정없이 흔들었다. 입으로는 계속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그놈은 적잖이 당황한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내 손에 힘없이 맡겨진 채 이리저리 펄럭이기만 했다.
"아씨, 야! 왜 이래! 알았어, 알았어! 줄게!"
당황한 나머지 내 등쌀에 떠밀려 교실 맨 뒤 벽까지 밀려난 그 아이는, 내 손을 뿌리친 채 숨겨놓았던 빨간 샤프를 황망하게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계속 울었다. 내 자리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한도 끝도 없이 울었다. 수치스러움과 분노가 한데 버무려져 쏟아져 들어왔다. 내 빨간 샤프는 다시 그 아이의 손에 들려 "뭐야? 안 우네~?" 하는 소리와 함께 허무하게 다시 내 필통으로 돌아왔다. 우는 소리가 안 나니 울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다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우는 모습을 본 선생님조차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 이후로는 그 아이에게 배를 뚜들겨 맞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딱 두 번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마음속에서 빨간 무엇인가가 팡-하고 터지는 느낌. 흔히 말하는 폭발적 분노라는 것이 그것일까. 늘 내성적이고 나서지 않는 성격인지라 조용조용히 사는 편이지만, 그런 나를 만만하게 보고 지속적으로 무시하거나, 누가 봐도 현저하게 무개념인 짓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 빨간 것이 때때로 제어할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나에게 그것은 단순히 분노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 빨간 것은 늘 죄책감, 혹은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을 동반한다. 화를 내고 나서 화를 낸 상대방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눈물이 날 정도로 미안하거나,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자책이 더 오래 찾아온다. 그래서인지 난 늘 그 분노를, 그 빨간색 지하실 같은 마음을 다루기가 어렵다.
그 방의 문을 영원히 걸어 잠그고, 주변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다 보면 내가 병이 날 것 같고, 또 그 방을 활짝 개방하자니, 내가 내 분노에 못 이겨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힐까 겁이 난다. 최근에는 또 웬 취객이 시비를 걸어 분에 못 이겨 화를 냈다가 주변 친구들에게 미안한 상황이 생긴 적도 있고, 또 직장상사에 항상 웃으며 대응해줬다가 내가 한 업무도 아닌 것에 내 탓을 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본 적도 있다. 여느냐, 닫느냐- 늘 그것이 고민인 것이다.
그저 요새는 주변 사람들이 그 문 근처에서 서성거리지 않길, 괜히 그 문을 쾅 열어젖히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한없이 무해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분노가 있다. 모두 마음속에 '개조심'이라고 시뻘겋게 적힌 지하실 하나쯤은 있는 것이다. 아무 반응도 없다고 계속 건들다가는 조용히 잠자고 있던 개 한 마리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맹견까지는 아니고- 강아지라고 하자.) 한마디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거다.
모든 사람들이 그 지하실 문을 열기 전, 먼저 조심해주면 어떨까. 적어도 똑똑- 노크라도 먼저 해주는 매너를 보여주는 건 어떨까- 괜히 이상적인 바람을 가져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