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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바벨 Nov 01. 2020

꿈 2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한동안 중대에 찬 기운이 돌았다. 나는 맞선임을 일러바친 개념 없는 후임이 되어 있었다.


부소대장은 나를 때린 맞선임을 전출 보내고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거라는 처음 말과 달리 나에게 타협점을 제시했다. 이렇게 맞선임을 보내는 건 너무 가혹하고, 그도 앞으로 날 때리지 않는다는 약속과 사과를 한다 하니 잘 지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사과를 받고 대충 마무리했다.


이후로 나를 건드리는 선임은 없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나직이 욕을 하고, 은근슬쩍 어깨를 치며 지나가고, 인사를 받아 주지 않는 정도가 다였다. 한 명에게 지독한 괴롭힘을 당하는 것과 모두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 중 무엇이 더 힘든 걸까.


부소대장은 힘들면 이야기하라고 했지만 이제 나는 정말로 혼자 버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끄러워지지 않았으면 하는 부소대장의 태도를 느꼈으니 나를 지키는 건 내가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나의 잘못이 아니란 걸 끊임없이 스스로 상기시켰다. 어차피 나를 괴롭히는 그들도 죄책감을 갖지 않을 테니 나 역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며 명분도 만들어 주었다.


나는 틈만 생기면 졸렬하게 괴롭혀대는 선임들에게 책잡히지 않으려 더 악착같이 생활했다. 부러 큰소리로 대답했고, 무시당할지언정 똑바로 쳐다보면서 분명하게 경례했다. 나를 유독 싫어하던 선임은 인사도 받기 싫으니 자신에게 경례하지 말라며 욕을 했지만 나는 다음날에도 다다음날에도 똑같이 경례했다. 그게 내가 선임들에게 예의를 지키며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이었다. 경례를 안 하면 책잡힐 게 하나 더 생길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하루를 버텨내면서 나는 사람들의 난폭한 시선에 의연해지는 법을 조금씩 익혀갔다.


반항을 멈출 수 있는 깊은 밤이 찾아오면, 하루만큼 멀어진 군생활에 조금 안도했고 다가올 지랄들에 많이 불안했다. 엄마 생각이 자꾸 났다. 엄마를 떠올리면 마음이 약해졌다가 다시금 강해졌다. 엄마에겐 설명할 수 없는 이 시간들을 무사히 버텨내 홀로 강해져 왔다며 엄마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 누워있다 보면 이윽고 종일 힘주느라 피곤했던 나를 무언가가 죽죽 잡아당겨 검은 우주로 탈출시켜 주었다.


당시 나는 매주 일요일 종교 활동 시간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선임들과 떨어져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불교로 가는 인원이 가장 적었다. 심지어 절이 부대 밖에 위치해 있어 차로 15분가량 이동해야 하는 탓에 외출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절의 고요한 분위기와 향냄새, 군 스님의 깨어있는 듯한 선지적인 말씀이 좋았다. 그곳에 있을 땐 나의 번뇌와 잡스러운 생각들도 희석되는 것 같았다. 물론 부대로 돌아올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응어리가 마음을 감아버리곤 했다.


그렇게 별의별 민간요법, 아니 군간요법을 써가며 간신히 버텨내던 하루가 쌓여가고 내게도 조금의 변화가 보였다. 같은 생활관은 아니지만 후임들이 들어왔고, 몇 주 후면 일병 진급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대개 나와 단둘이 있을 때) 내 인사를 받아주는 선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힘내라는 말을 툭 던지고 지나가는 선임도 있었다. 그들에게 인정받는 것 같은 기분이 마냥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마음마저 일었다. 어느 일병 선임은 나를 조용히 불러 이것저것 물었다. 해병대 왜 왔냐고 묻길래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선임은 나에게 지금은 그런 사람이 된 것 같냐고 물었고, 나는 조금 고민했지만 지킬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절대 지지 말라고 선임이 얘기해주었다. 내 마음을 안다며 자신도 해병대 전통이 많은 부분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순간 그 선임이 부대 안의 누구보다도 어른 같아 보였다.


정말 끝까지 버텼다면 이겼을까.


무엇을 이겼을까. 버티고 버텨 무언가를 관철시켰을까.

아니, 그럴 수 있었을까. 나 역시 권력에 안주하는 방관자가 되진 않았을까. 보상심리나 편안함에 대한 점력이 생긴 나머지 부조리한 것들을 천연덕스럽게 대하진 않았을까. 그래도 어쩌면 스스로 어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순 있지 않았을까. 나도 너를 이해한다면서 결국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훌륭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그러면 그게 이긴 걸까.


나는 얼마 후 나를 응원해준 그 선임이 후임을 욕하며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모습을 보았고, 그 선임이 어디까지 해병대 전통으로 허용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 역시 이제는 어른이지만 여전히 내게 어른들은 아쉽고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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