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자, 실패의 냄새가 나지 않을 곳으로.

by YOU A MI

"이불속에 있어요"


크나큰 상심으로 몇 날 며칠을 이불속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던 적이 있었다. 걱정하며 안부를 묻는 전화를 겨우 받을 수 있을 무렵, '뭐 하고 있니'라는 질문에 '아직 이불속에 있어요'라고 대답하자 상대방은 안심하며 웃는다.


"한 발짝도?"

"네, 그렇지만 한쪽 발은 살짝 빼놨어요"

"그런 농담도 할 줄 알고 살만해졌나 보네, 이제 안심이다."


여전히 이불 속이였지만 생존여부를 확인한 상대는 안심한다. 안심하는 목소리를 듣고 이쪽도 어쩐지 안심한다. 둘 다 이제 절망의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 통화를 끝으로 이불 밖으로 슬그머니 빼두었던 발을 꼼지락 거리며 일어났다.

없던 기운이 생기거나 눈물이 마르진 않았다. 그런데도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면 걸을 수는 있겠구나.


다음날 나는 무작정 여행길에 나선다. 문득 떠올린 장소가 책 속에만 있던 '무량수전'이었다. 정말 아무 연관성도 이유도 없이, '실물로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그 문장하나를 중얼거리며 울면서 이불속에서 나와 아무 생각 없이 이끌리듯 이곳으로 첫 발걸음을 했던 그해 겨울이 아직도 생생하다.


살면서 행하고 선택했던 수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이 장면을 꼽을 것이다. 오랜 시간 이불 안에서 움츠려있다 첫 발걸음을 떼고 나간 곳에 이곳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2013년 눈이 아주 많이 내렸던 날이었다. 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걸었고, 걱정이 되어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던 엄마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내가 발걸음을 멈칫하면 같이 멈춰 섰고, 내가 뽀드득 소리에 귀 기울이며 천천히 걸으면 같은 속도로 천천히 걸어주셨다. 어떤 말도 붙이지 않고 그저 뒤에서 묵묵히. 분명 나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한 발치 뒤에서 조심스럽게 같이 걷던 엄마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선하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버스가 아닌 택시로 이동하기로 했었고, 택시에는 같은 목적지에 간다는 동승자가 이미 타고 있었다. 동승자는 "한 소설책 속에서 매년 1월 1일에 같은 장소에 간다는 표현에 매력을 느끼게되어 저도 이곳에 매년 오게되었어요."라는 식의 대화를 했던가. 이 대화가 어쩐지 마음에 남겨졌고, 그때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나에게 매년 올 곳이 될 것 같다는 그런 막연한 생각.


그날 그 눈 덮인 부석사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모른다. 인적이 없었기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었고, 그곳에 단지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허락해주고 그저 받아주었다는 것에 또 얼마나 많은 위안을 받았던가.

그래서 약속을 했다.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그때는 우는 모습이 아니라 웃으면서 '그때의 나를 위로해 줘서 고마웠다'고 그렇게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다짐의 다짐을 하며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0년 넘게 이곳은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우연'히 떠올린 장소로 향했고, 우연히 택시 안에서 만났던 동승자와의 우연한 대화가 나를 매년 이 장소로 오게 하는 '선택'으로 이끌었다. 때문에 데일리 드로잉을 하고 나서부터는 매년 스케치북이 이곳이 그려져 있다. 올 때마다의 감정이 펜 끝에 녹아 있어서 같은 장소, 같은 풍경이지만, 다른 재료, 다른 그림체, 다른 마음가짐으로 이곳을 남겨왔다.


나가자, 실패의 냄새가 나지 않을 곳으로 - <어쩌다 학교가 집이 되었다> 중에서
나가자, 실패의 냄새가 나지 않을 곳으로


실패를 겪을 때마다 이불속에 숨어 있었다. 이불속에서 실컷, 꼭꼭 숨어있다가 이제 좀 벗어나 볼까 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 무렵에는 무조건 밖으로 나간다. 일단 실패의 냄새를 가득가득 모아둔 이불에서부터 멀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든 나간다. 한없이 배회할 수도 있고, 늘 가던 어떤 곳으로 향할 수도 있다.


내겐 '매년 향하는' 그런 곳이 있다. 서러움과 고민을 한껏 지고 갈 때도 있고 무탈할 때도 있으며 기분 좋게 드라이브 갈 때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을 보내본다. 내가 지금 서있는 곳에서의 시간들도 들여다보고, 이곳에 오기까지의 길들도 돌아보고, 이곳을 떠나고 나서의 길들도 그려본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도달한 곳이 내게 묻는다. 이곳에 왜 왔지, 네가 서있는 곳은 어디지?


"저 사실은 너무 힘들어요"를 내뱉으면 울어버리기도 만다.

"이제 제법 살만합니다"를 내뱉으며 멋쩍게 웃기도 한다.

"잘 모르겠네요" 하면서 답을 구하기도 하고, 아무 말 없이 '지금'만을 느낄 때도 있다.

그리고 중얼 거린다. 내가 지금 서있는 곳, 이곳은 적어도 이불 '밖'이다.


아픔과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나는 외친다. 일단 나가자, 움직이자, 그리고 어떤 길로 갈지 어떤 사람을 만날지, 어떨지의 선택의 행위를 다시 시작하자. '나가자'라는 새로운 시작의 말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부석사 그림 이야기 : https://brunch.co.kr/@moonchunj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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