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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4. 2022

<고전정신> 생활4. 나만의 가치관을 고수해도 돼

제임스의 『실용주의』

사례 1.

용민 씨를 보면 용민 씨의 부모님은 속이 탄다. 아들이 얼른 돈을 모으고 결혼해서 안정적인 삶을 살면 좋겠건만, 용민 씨는 부모님의 기대와는 완전히 어긋나는 삶을 살고 있어서다. 용민 씨가 직장을 다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중이다. 그런데도 그가 돈을 모으지 못하는 것은 용민 씨만이 가진 특유의 가치관 때문이다. 용민 씨의 가치관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나눔이다. 그는 월급을 받는 족족 생활비를 제외하고 전부 기부한다. 그의 삶에서 물질적 가치는 최우선 순위가 아니다. 어려운 사람과 나누고,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용민 씨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다. 그는 기부도 모자라서 회사에 나가지 않는 주말에는 틈틈이 봉사활동까지 한다. 부모님은 그런 아들에게 잘 살려면 자기 자신부터 챙겨야 한다고 말하지만, 용민 씨는 자신이 적당히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용민 씨는 충분히 행복하다. 그럼에도 열심히 돈을 모으는 친구들을 보고, 문득 부모님의 조언을 떠올릴 때면 의문이 생기기는 한다. “나만의 가치관을 고수해도 될까?”     


사례 2.

민지 씨를 보면 민지 씨의 부모님도 속이 탄다. 딸이 얼른 취업해서 안정적인 삶을 살면 좋겠건만, 민지 씨는 부모님의 기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어서다. 민지 씨는 매번 새로운 활동에 도전한다. 여행이 가고 싶으면 여행을 가고, 요리를 배우고 싶으면 요리를 배우고, 커피를 배우고 싶으면 커피를 배운다. 줏대 없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알고 보면 민지 씨는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지 씨에 따르면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어떤 활동에 매진하는 삶은 불행한 삶이다. 그렇다고 민지 씨가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본인의 생활비는 스스로 충당한다. 부모님은 그런 딸에게 잘 살려면 하기 싫어도 직장을 다니며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민지 씨는 자신이 적당히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민지 씨는 충분히 행복하다. 그럼에도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고, 문득 부모님의 조언을 떠올릴 때면 의문이 생기기는 한다. “나만의 가치관을 고수해도 될까?”          



나만의 가치관을 고수해도 될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한다. 못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일까. 이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마다 제각기 잘 사는 삶의 기준이 다른 탓이다. 누구에게는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삶이 잘 사는 삶이다. 또 누구에게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잘 사는 삶이다. 다른 누구에게는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삶이 잘 사는 삶일 것이다. 이렇게 잘 사는 삶의 양태는 다양하기에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토록 다양한 잘 사는 삶의 양태는 특정한 가치관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삶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도,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삶도 각기 특정한 가치관에 기반한다는 말이다.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삶은 도덕이라는 가치관에 의거한 삶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은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기인한다.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삶은 가족애를 최고의 가치관으로 삼는다. 우리가 도덕, 물질주의, 가족애 중 어떤 가치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잘 사는 삶의 기준은 달라진다.

한마디로 가치관은 잘 사는 삶의 양태를 결정하는 근원이다. 가치관은 어떻게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우리가 영위하는 잘 사는 삶의 양태는 우리가 가진 가치관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용민 씨와 민지 씨의 사례를 보라. 용민 씨는 나눔을 가치관으로 정했다. 민지 씨는 본인의 마음을 가치관으로 정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잘 사는 삶의 양태를 현실화시켰다.

자신만의 가치관이 확고한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잘 살 수 있는지를 명확히 인지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자신만의 가치관을 확고히 가진 사람은 몇 없다. 우리는 대부분 나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기는 하지만, 나만의 가치관을 고수해도 되는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이 문제는 대세에 따르지 않는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심화된다. 주변에 열심히 돈을 모으는 친구들을 둔 용민 씨. 주변에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을 둔 민지 씨. 주변 사람들이 다들 열심히 돈을 모으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가치관을 고수하는 용민 씨와 민지 씨는 점차 의문을 품는다. “나만의 가치관을 고수해도 될까?”

퍼스(C. S. Peirce), 듀이(J. Dewey)와 더불어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권위자로 꼽히는 윌리엄 제임스(W. James)는 우리들의 이 같은 의문을 해소해 준다. 그는 제목부터가 남다른 저서 『실용주의』에서 실용주의 철학을 소개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 중 하나인 실용주의는 철학의 실생활에의 적용 가능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의 특성은 학문의 명칭에서부터 암시된다. 실용주의(pragmatism)는 그리스어 ‘pragma’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pragma’는 행동 및 실천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 실용주의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철학들이 우리의 행동 및 실천으로 이어짐으로써 실생활에 적용되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용주의는 특정한 내용을 함의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태도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철학들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가 바로 실용주의다. 따라서 실용주의를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체계적으로 해설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제임스의 『실용주의』도 실용주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아니다. 단지 제임스가 자신이 강의했던 내용을 글로 집필해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하지만 실용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정리하지 않았다고 해서 제임스가 앞에서 생겨난 우리들의 의문을 해소해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실용주의가 추구하는 학문적 방향성에 어울리게도, 제임스는 『실용주의』를 통해 실생활에서 생긴 우리들의 의문을 말끔하게 씻겨 준다.     


독단의 무의미한 외침

다시 말하지만 실용주의는 철학의 실생활에의 적용 가능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철학들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다. 이 두 명제를 종합하면, 실용주의는 철학의 실생활에의 적용 가능성을 탐구하는 태도로 요약된다. 제임스는 그 무엇보다도 철학이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지 탐구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이 발견된다. 실용주의는 왜 특정한 내용이 아닌 태도 그 자체만을 강조하는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철학이 등장했지만 어느 하나 특정한 내용을 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등장한 철학들은 모두 자신만의 내용을 함의한다. 그리고 자신이 함의한 내용에 진리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성주의는 이성이라는 진리를 경험주의는 경험이라는 진리를 표방하는 식이다. 그런데 실용주의는 다른 철학과 차별화된 진리를 표방하지도 않으면서 태도 그 자체만으로 철학을 자처한다. 생각해 보면 태도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철학을 자처한 실용주의는 다소 모순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제임스를 포함한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태도를 강조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제임스는 철학의 유의미성은 실생활에의 적용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역설한다. 철학은 실생활에 적용될 때 비로소 유의미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등장한 철학들은 실생활에 충분히 적용되지 못했는데, 그 원인은 기존의 철학들이 지닌 독단적인 태도 때문이다. 제임스는 기존의 철학들이 하나같이 독단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철학들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철학을 배격하며 오직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제임스는 기존의 철학들이 내보이는 이러한 독단적인 태도가 철학의 실생활에의 적용을 가로막는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철학들이 내보이는 독단적인 태도는 매우 부적절한 태도다.

하지만 기존의 철학들에게도 사정은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철학들은 모두 자신만의 진리를 표방하는데 철학들이 자신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독단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철학들은 진리를 보편적인 그 무엇으로 여긴다. 진리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단 하나의 가치다. 따라서 서로 다른 진리들은 사이좋게 공존할 수 없다. 진리들이 공존하는 순간 진리는 진리로서의 자격인 보편성을 상실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철학들은 자신이 표방하는 진리에 독자적인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자신이 표방하는 진리의 보편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철학을 배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철학들은 외친다. 나의 진리가 진정한 진리고 나머지는 전부 사이비 진리에 불과하다! 무조건 나만이 옳다! 이처럼 지금까지 등장한 철학들은 예외 없이 독단적인 태도를 고집한다. 심지어 철학들은 자신이 표방하는 진리만이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다고 우기기까지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합리주의도 용납하겠지만, 실재 자체라든가 진리 자체가 변동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정해창 편역, 아카넷, 2008, 311쪽)     


제임스는 특히 이성을 진리로 표방하는 이성주의 철학에서 이러한 독단적인 태도가 두드러진다고 꼬집는다. 우리는 이미 이성주의의 대표자인 데카르트를 알고 있다. 데카르트도 이성만을 진리로 표방하며 이성을 제외한 감각, 감정, 경험과 같은 요소들을 의심해 배격하지 않았던가. 데카르트를 필두로 한 이성주의 철학은 시종일관 이성만을 진리로 삼는 독단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그런데 이는 데카르트와 대척점에 서 있는 니체도 마찬가지다. 니체는 이성을 배격하고 감각과 감정을 진리로 내세운다는 점에서는 데카르트와 대조적이지만, 자신이 표방하는 진리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을 배격하는 독단적인 태도는 데카르트의 그것과 같다. 이런 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철학들은 각각 상이한 진리를 표방하면서도 다른 철학을 배격하는 동일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철학들은 다른 철학을 배격함으로써 자신이 표방하는 진리의 보편성을 확립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진리를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의외로 그 시도는 실패로 귀결된다. 철학들이 표방하는 진리는 일부 사람에게만 적용될 뿐 모든 사람에게 고스란히 적용되지는 않는다. 보편적인 진리를 매개로 실생활에 적용되고자 하는 철학의 노력은 무위에 그친다. 기존의 철학들은 실생활에 충분히 적용되지 못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보편성을 확립한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니? 진리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단 하나의 가치가 아닌가? 이에 대해 제임스는 애초에 보편성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개개인이 처한 상황은 각자 다르기 때문에 애당초 보편성의 성립은 불가능하다. 진리가 적용되려면 보편성이 아닌 시대와 지역에 따른 개개인의 개별성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진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단 하나의 진리만을 들이미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기존의 철학들은 진리를 보편적인 그 무엇이라고 우기며 모든 사람에게 무리하게 적용시키려고 한다. 당연하게도 진리는 일부에게만 적용되어 철학이 자랑하는 보편성을 무색하게 만든다. 보편성의 확립이 오히려 보편성의 상실을 불러일으킨 꼴이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데카르트의 이성만을 중시하겠는가.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니체의 감각과 감정만을 찬양하겠는가. 그럼에도 지금까지 등장한 철학들은 보편성의 환상에 마취되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진리의 보편성을 확립하기 위해 취했던 독단적인 태도가 발목을 잡은 셈이다. 제임스가 비판한 것처럼 지금까지 등장한 철학들은 독단적인 태도로 인해 실생활에 충분히 적용되지 못했다. 철학은 실생활에 적용될 때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하지만 독단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철학은 실생활에 적용될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철학들은 실생활과 괴리된 채 독단의 무의미한 외침만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태도를 달리해야 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진리를 표방하는 철학이 등장해야 할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철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새로운 진리를 표방한다고 해도, 다른 철학을 배격하는 독단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기존의 철학들이 거듭한 실패를 똑같이 답습할 것이다. 그 철학 역시 실생활에 적용되지 못하는 철학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철학이 실생활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결국 태도를 달리해야 한다. 이제 철학은 독단적인 태도에서 헤어 나와 새로운 태도를 갖춰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은 새로운 진리를 표방하는 철학이 아닌 새로운 태도를 표방하는 철학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실용주의는 정당성을 획득한다. 앞서 말했듯이 실용주의는 철학의 실생활에의 적용 가능성을 탐구하는 태도다. 실용주의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철학들을 모두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실용주의에서 어느 하나의 철학만을 고집하거나 다른 철학을 배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분명 기존의 철학들이 내보인 독단적인 태도와는 다른 새로운 태도다. 실용주의는 차별화된 진리를 표방하지 않고도 태도 그 자체만으로 철학을 자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제임스를 포함한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그토록 태도를 강조한 이유다.

실용주의는 기존의 철학들을 대상으로 이것들이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철학들은 모두 실생활에 적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개개인은 각자 다른 상황에 처해 있으므로 개개인의 실생활에 적용되는 철학도 각자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관념이 참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실제 삶에서 어떤 구체적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같은 책, 290쪽)     


제임스는 어떤 특정한 진리가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활용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그 진리를 표방하는 철학은 그의 실생활에 적용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는 고지식하게 단 하나의 진리만을 들이밀지 않는다. 제임스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단 하나의 진리 대신,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개개인에게 알맞게 적용되는 수많은 진리를 옹호한다. 유용하게 활용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진리가 무엇인지는 개개인마다 다르다. 누구에게는 데카르트의 이성이, 다른 누구에게는 니체의 감각과 감정이 진리로서 알맞을 수 있다. 그럼 그들은 각각 데카르트 철학과 니체 철학을 실생활에 적용하면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에게 유용하게 활용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진리가 날마다 바뀐다고 해도 실용주의는 그것을 용인한다. 아니 도리어 진리의 교체를 장려한다. 오늘은 데카르트의 이성이 내일은 니체의 감각과 감정이 유용하게 활용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오늘은 데카르트 철학을 적용하면 되고 내일은 니체 철학을 적용하면 된다. 제임스는 언제든지 진리의 교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오늘 얻을 수 있는 진리로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 그것을 거짓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같은 책, 308쪽)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는 없다. 진리는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우리는 상황에 맞게 진리를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 진리가 유연하게 적용될 때 특정한 진리를 표방하는 철학의 실생활에의 적용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철학 중에서 우리의 실생활에 호응하는 철학을 선택할 수 있다. 어느 하나의 철학이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다른 철학은 절대적으로 그르다거나 하는 논쟁은 무가치하다. 서로 대조되는 데카르트 철학과 니체 철학도 모두 실생활에 적용할 여지가 다분하다. 제임스는 우리에게 열린 자세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철학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배타적인 자세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철학 외에 다른 철학을 배격할 필요는 없다. 실용주의의 신조 아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철학들은 실생활에의 적용 가능성을 확보한다.

실용주의는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철학이라면 그 어떤 철학이라도 받아들인다. 철학의 실생활에의 적용 가능성을 탐구하는 태도를 갖춤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철학들은 본격적으로 실생활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실생활과 괴리된 채 독단의 무의미한 외침만을 지속하던 철학들이 실용주의에 의해 실생활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는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기존의 철학들은 실생활에 적용되어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실용주의라는 새로운 태도는 독단적인 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생생한 철학의 지평을 열어젖힌다.          



특정한 진리를 표방하는 철학은 개인에게서 가치관으로 승화된다. 유용하게 활용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진리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므로, 가치관으로 승화되는 철학도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사람마다 자신의 삶에 어울리는 가치관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가치관이 있다는 뜻과 같다. 각자 다른 상황에 처한 개개인이 각자 다른 철학을 선택하듯이 우리도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 나의 삶에 어울리는 가치관을 골라야 한다. 우리의 손은 선택권을 쥔 상태다. 우리는 나의 삶에 어울리는 가치관을 골라 그 가치관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

나의 삶에 어울리는 가치관을 고른다면 우리의 가치관은 일상 속에서 온전히 실현된다. 철학이 실생활에 적용될 때 유의미해지는 것처럼 가치관도 일상 속에서 실현될 때 유의미해진다. 나의 삶에 어울리는 가치관이 일상 속에서 실현되면서 우리는 잘 사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나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가치관을 고른다면 그것은 일상 속에서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다. 나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가치관은 무익하다. 어울리지도 않는 가치관을 억지로 부여잡고 사는 삶은 그 누구보다도 못 사는 삶이다. 나눔을 가치관으로 정한 용민 씨와 본인의 마음을 가치관으로 정한 민지 씨는, 자신의 삶에 어울리는 가치관을 골랐기에 잘 사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주변 사람들의 영향으로 열심히 돈을 모으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삶을 억지로 살았다면, 두 사람은 자신만의 잘 사는 삶을 영위할 수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나만의 가치관을 고수해도 된다. 절대적으로 옳은 가치관은 없다. 특정한 가치관만이 무조건 옳다는 주장은 독단의 무의미한 외침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특정한 가치관이 옳다고 주장하며 우리를 종용해도 우리는 그저 나의 삶에 어울리는 가치관을 따르면 된다. 제임스는 우리에게 말한다. 나만의 가치관을 고수해도 된다고. 나의 삶에 어울리는 가치관을 고수할 때 잘 사는 삶은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치관에 확신을 품고, 이제는 나만의 가치관에 대한 의문을 거둬들여도 될 것이다.          



□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1842~1910)

제임스는 184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과 유럽을 왔다 갔다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덕분에 제임스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고, 여러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자란다.

제임스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 화학과 의학을 전공한다. 졸업 후에는 의사의 길을 걷는 대신 모교에서 해부학, 심리학, 철학 등을 강의한다. 그는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틈틈이 저술에도 매진한다. 더불어 심리학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한다.

이후 제임스는 모교인 하버드 대학에서 퇴직한다. 퇴직 후에도 강의와 저술에 집중한 그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실용주의』, 『진리의 의미』를 비롯해 다수의 저서를 남긴다. 죽기 전까지 학술적 활동을 꾸준히 지속한 제임스는 1910년 세상을 떠난다.          



※ 추천 도서

윌리엄 제임스, 『실용주의』, 정해창 편역,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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