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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4. 2022

<고전정신> 생활3. 흔들리는 나를 다잡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사례 1.

요즘 들어 우용 씨는 위축되어 있다. 입사 지원을 하는 족족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 때문이다. 서류 전형에서 탈락하는 경우는 부지기수고, 어쩌다 서류 전형을 통과해도 면접에서 번번이 탈락하기 일쑤다. 처음에는 대기업만 고집했다가 지금은 경쟁률이 낮은 중소기업까지 노리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우용 씨의 실업 기간은 점점 길어진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생활비로 쓰려고 모아 둔 돈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고민 끝에, 우용 씨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주식 투자에 도전한다. 그는 얼마간의 돈을 주식에 투자한다. 하지만 마음먹고 투자한 주식도 연일 하락세를 보인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우용 씨의 머릿속은 고통스러운 일만 일어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안 그래도 위축되어 있던 우용 씨는 더더욱 위축된다. 우용 씨의 인생은 비운(悲運)투성이인 것만 같다.     


사례 2.

며칠 사이에 우용 씨의 표정은 확 밝아져 있다. 그가 지원한 회사로부터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면접을 볼 때까지만 해도 우용 씨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면접 자리는 불편했고 면접관들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기대를 내려놓았었는데 합격이라니! 더군다나 합격한 회사는 취업 준비생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대기업 중 하나다. 우용 씨는 드디어 백수 생활을 청산한다. 더불어 주식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연일 하락세를 보였던 주식이 어느새 상승세로 바뀌더니 오늘은 상한가를 쳤다는 소식이다. 원금의 손해가 메워진 것은 물론 이제는 이익이 나기 시작한다. 우용 씨는 겹경사를 누린다.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우용 씨의 머릿속은 즐거운 일만 일어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그렇게 우용 씨는 즐거움에 취해 버린다. 그럴수록 위축되어 있던 그의 모습은 서서히 자만하는 모습으로 뒤바뀐다. 우용 씨의 인생은 행운(幸運)투성이인 것만 같다.          



끝없이 흔들리는 나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하면 우리는 힘들어한다. 반대로 즐거운 일을 경험하면 우리는 취해 버린다. 이는 각각 위축과 자만으로 이어진다. 고통스러운 일에 힘들어하는 사람은 위축되고, 즐거운 일에 취해 버린 사람은 자만한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통스러운 일만 경험하거나 즐거운 일만 경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인생에는 고통스러운 일과 즐거운 일이 번갈아 가며 일어난다. 이에 따라 우리도 위축된 모습과 자만하는 모습을 번갈아 가며 내보인다. 마치 우용 씨의 모습처럼 말이다. 고통스러운 일과 즐거운 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위축과 자만의 양극단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린다.

흔들림은 무질서를 야기한다. 그리고 무질서는 내면의 평화를 깨뜨린다.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우리의 내면은 시종일관 어지러운 상태에 빠진다. 우리가 위축되면 내면은 열등감의 폭발로 어수선해진다. 그러다가 우리가 자만하는 순간이 오면 내면은 우월감의 폭주로 난잡해진다.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려 무질서의 혼돈에 침잠한 우리는 더 이상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지 못한다. 끝없이 흔들리는 나. 결국 끝없이 흔들리는 내가 문제로 떠오른다.

내면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즉 끝없이 흔들리는 나를 다잡아야 한다. 흔들리는 나를 다잡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철학자인 아우렐리우스(M. Aurelius)가 쓴 『명상록』에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흔들려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현대인만이 겪는 문제는 아니었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도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렸다. 아우렐리우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오히려 그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흔들림의 정도가 심했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도 아우렐리우스만큼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격렬하게 흔들린 사람은 찾기 어려울 정도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하던 2세기 로마 제국은 전성기를 누리는 동시에 쇠퇴의 기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한편으로는 번영을 구가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빈번한 전쟁과 전염병의 창궐, 경제 문제로 몸살을 앓는 시대기도 했다. 아우렐리우스의 로마 제국은 전성기와 쇠퇴기의 기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통치하는 제국의 상황이 이러하니 황제는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아우렐리우스도 우용 씨처럼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렸다. 전쟁, 전염병, 경제 문제는 황제를 위축시켰다. 반면에 아직까지는 유효한 팍스 로마나라는 간판은 황제를 자만하게 했다. 이렇듯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흔들린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당연하게도 내면의 평화를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끝없이 흔들린 황제 아우렐리우스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였다. 철학자의 도움으로 황제는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다잡는 데 성공한다. 아우렐리우스는 무슨 철학을 공부했길래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다잡을 수 있었을까? 아우렐리우스가 공부한 철학은 스토아 철학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나를 다잡는 방법으로 스토아 철학을 제시한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 철학은 그의 저서 『명상록』에 녹아들어 있다.

『명상록』은 아우렐리우스가 전쟁터에서 쓴 글을 후대 사람들이 정리해 출판한 책이다. 『명상록』에 기록된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적 사유는 그가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다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 준다. 상상해 보라. 자신이 통치하는 제국의 국운이 걸린 전쟁을 치르면서,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얼마나 흔들렸겠는가! 황제는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스토아 철학으로 다잡는다. 말하자면 『명상록』은 철학자 아우렐리우스가 끝없이 흔들리는 황제 아우렐리우스를 다잡는 과정을 그린 고전이다.     


흔들림의 원인은 나 자신이다

스토아 철학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페르시아, 이집트를 정복한 뒤 인도까지 진출해 대제국을 건립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를 비롯해 여러 지역의 문화가 뒤섞여 헬레니즘 문화가 형성되는데,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의 사상적 산물 중 하나가 바로 스토아 철학이다. 초창기에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발아한 스토아 철학은 이후 로마 지역으로 전파되어 아우렐리우스에게까지 이른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 곳곳에서 스토아 철학의 세계관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우렐리우스가 묘사하는 이 세계관이 흔들리는 나를 다잡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우주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다. 우주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땅과 우리 머리 위의 하늘을 포함해 이 세상의 모든 공간을 아우른다. 당연히 공간 속에 사는 존재자들도 우주 공동체에 속한다. 산과 바다, 동물과 식물, 그리고 우리 인간과 인간이 만든 사물까지 모든 존재자가 우주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을 품은 거대한 공동체는 이성의 법칙에 따라 운행되며, 이성의 법칙 아래서 우주의 구성원들도 질서 정연하게 움직인다. 이성의 법칙에 기반한 우주의 질서가 만물을 지배하는 형국이다. 우주의 구성원인 인간과 사물과 자연은 우주의 질서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일도 우주의 질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일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은, 우주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는 인간과 사물과 자연 사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고, 사물이 만들어지고 망가지고, 자연이 싹을 틔우고 잎을 떨구는 과정은 모두 우주의 질서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다. 생성과 소멸을 비롯해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일들은 어느 것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 없다. 이렇게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의 세계관을 통해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험하는 모든 일의 실상을 해명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은 우주의 질서에 의거해 이루어진 결과나 다름없다. 우주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과 삶, 명성과 불명예, 고통과 쾌락, 부와 가난, 이 모든 것은 선인들에게도 악인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며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천병희 옮김, 숲, 2005, 36쪽)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은 우주의 질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다. 이 말인즉슨 어떠한 일도 그 자체로는 길하지도 흉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일은 그냥 일어난 일 그 자체에 불과하다. 고로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은 우주의 차원에서는 길흉을 논할 대상조차 아니다. 한 글자로 표현하면 그것은 그저 운(運)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운을 운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길하지도 흉하지도 않은 운 그 자체에 ‘비(悲)’나 ‘행(幸)’이라는 글자를 억지로 갖다 붙인다. 그렇게 우리는 운을 비운이나 행운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이 일 그 자체로 머물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일과 즐거운 일로 탈바꿈한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우주의 질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을 애써 고통스러운 일과 즐거운 일로 판단한다. 그러고 나서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하며 위축되고 즐거운 일을 경험하며 자만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우렐리우스는 우리 인간이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흔들리는 원인을 통찰한다. 흔들림의 원인은 나 자신이다. 우리가 일 그 자체를 고통스러운 일과 즐거운 일로 판단해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자만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를 위축과 자만의 딜레마에 빠뜨린 원흉은 우리 자신인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흔들리게 한다. 이러한 흔들림으로 인해 야기되는 무질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주의 질서를 직시하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이 우주의 질서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진실 앞에서 눈먼 우리 인간은 끝없이 흔들리며 내면의 평화를 스스로의 손으로 박살 낸다.     


내면의 평화를 찾아서

흔들림의 원인은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흔들림의 원인을 제거해 흔들리는 나를 다잡는 일이다. 흔들리는 나를 다잡을 수 있다면 깨져 버린 내면의 평화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감각적인 모든 것, 특히 쾌락으로 우리를 유혹하거나 고통으로 겁주거나 허영으로 부풀어 오른 것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싸구려고 경멸스럽고 더럽고 덧없고 죽어 있는 것인지 깨닫는 것은 우리 이성이 할 일이다.

(같은 책, 37쪽)     


흔들리는 나를 다잡는 작업은 현재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진실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은 우주의 질서에 의해 일어났으며, 따라서 일은 그냥 일어난 일 그 자체에 불과하다는 진실 말이다. 아우렐리우스는 고통스러운 일로 힘들어하고 즐거운 일에 취해 버리는 행태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진실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고통스러운 일과 즐거운 일로 위축되거나 자만하지 않을 준비를 마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우렐리우스는 이성을 지목한다. 상술했듯이 우주의 질서는 이성의 법칙에 기반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을 발생시키는 우주의 질서는 이성의 법칙을 토대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성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성적 능력을 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을 활용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이 우주의 질서에 따라 일어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진실은 이성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다. 우주의 질서를 확립하는 토대이자 인간이 가진 위대한 능력인 이성은 진실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이 이성을 활용할 때 비로소 진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성을 활용해 진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흔들리는 나를 다잡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흔들리는 나를 다잡는 작업에는 진실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끊임없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과 일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분리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네 마음은 네가 자주 떠올리는 생각과 같아질 것이다. 영혼은 생각에 의해 물들기 때문이다.

(같은 책, 80쪽)     


아무리 모든 일은 그저 일 그 자체라는 진실을 이해했어도 그 일을 고통스러운 일과 즐거운 일로 판단하는 습관은 단번에 고쳐지지 않는다. 진실을 잘 이해한 사람이라도, 습관에 의해 자신이 경험하는 일을 고통스러운 일 혹은 즐거운 일로 판단해 받아들인다면 위축과 자만은 피할 수 없다. 아우렐리우스의 표현대로 우리의 판단은 우리의 영혼을 물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과 일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분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을 고통스러운 일이나 즐거운 일로 판단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일 그 자체로 남는다. 일과 판단을 분리할 때 일이 쓰고 있는 가면은 벗겨진다.

일과 판단을 분리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우리는 일을 고통스러운 일 혹은 즐거운 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경험하는 일로 힘들어하지도 않고 그 일에 취해 버리지도 않는다. 이제 일은 일 그 자체다. 우리는 일을 의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자연스레, 경험하는 일 때문에 위축되고 자만하는 우리의 모습도 서서히 사라진다. 대신에 자존하고 겸손한 모습이 빈자리를 장악한다. 그렇게 내면의 흔들림은 멈춘다. 우리는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흔들리는 상태를 벗어나 자존과 겸손에 의해 바로 서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우리는 흔들리는 나를 다잡는다. 내면은 다시 평화로워진다.          



누구나 변덕스러운 사람을 꺼리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변덕스럽다.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해 위축되었다가도 즐거운 일을 경험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만하게 된다. 그러다가 또다시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위축된다.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흔들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를 다잡는 일은 분명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들리는 나를 다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흔들릴수록 우리 내면의 평화도 꾸준히 위협을 받는 탓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통해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다잡으라고 주문한다. 흔들리는 나를 다잡아, 고통스러운 일에 위축되지 않고 즐거운 일에 자만하지 않으면 내면의 평화는 유지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일어나는 일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긴다. 아우렐리우스 또한 스토아 철학의 대가답게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주장한다. 내면의 평화가 행복이다. 위축과 자만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닌, 자존과 겸손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사람이 행복을 누릴 자격을 얻는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인생을 주체적인 자세로 대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흔들리지 않고 주체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단지 인내해야 한다고 한탄하는 자조적인 자세와는 다르다. 그가 『명상록』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주체적으로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이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바깥에서 행복을 찾는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린다. 행복의 원천은 바깥이 아니다. 행복의 원천은 우리 안에 위치한다. 바깥이 아닌 내면의 평화에서 행복을 찾는 주체적인 자세를 취할 때 우리는 그토록 바라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

아우렐리우스는 121년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태어난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동시에 어릴 때부터 황제의 눈에 들어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자란다. 아우렐리우스의 영특한 모습과 성숙한 인품을 높이 평가한 황제는 그를 양아들로 삼기까지 한다.

황제가 영면하자 아우렐리우스는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다. 특이하게도 그는 자신과 함께 황제의 양아들로 입양되었던 동생과 권력을 분할한다. 두 황제는 서로 협력하며 로마 제국을 원활히 다스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이 죽어 아우렐리우스는 혼자서 로마 제국을 통치하게 된다.

아우렐리우스 재임 기간 내내 로마 제국에는 내부의 반란과 외세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우렐리우스는 반란을 진압하고 전쟁에서 승리해 팍스 로마나 시대를 이어 나간다. 또한 전쟁터에서 자기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데, 이는 그의 사후에 『명상록』으로 출판된다.

로마 제국의 5현제(賢帝) 중 한 명으로 존경을 받은 아우렐리우스는 180년 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         


 

※ 추천 도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천병희 옮김,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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