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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5. 2022

<고전정신> 맺는말

삶의 방향성을 확립하려는 우리는 지금까지 다양한 고전들을 만나 보았다. 우리는 플라톤부터 니체까지 서양의 철학사에 흔적을 남긴 철학자들의 고전을 살폈고, 카뮈나 괴테와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고전을 접했으며, 베버와 루소를 비롯한 위대한 사상가들의 고전을 훑었다. 다양한 고전들을 만나 본 결과 그들은 제각기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플라톤의 『국가』는 보이지 않는 가치의 중요성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운명 앞에서의 겸손함을, 밀의 『자유론』은 자유의 허용 범위를 제시하는 식이다. 이렇게나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고전들은 우리에게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제 우리는 자신만의 메시지를 제시하는 다양한 고전들에 둘러싸인 상태다.

그런데 다소 혼란스러운 점이 포착된다. 고전들이 제시한 다양한 메시지 간에 상충하는 부분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령 플라톤의 『국가』는 추상적인 세계인 이데아계를 중시하는 반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지상을 강조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운명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조언하는데 카뮈의 『페스트』는 부조리에 맞서 투쟁하라고 소리친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 외치지만 밀의 『자유론』은 자유를 넘어선 방종을 삼가라고 충고한다. 이는 우리가 맨 처음에 마주쳤던 식당 사장님들을 연상시킨다. 낯선 관광지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자기네 가게로 끌어당기는 식당 사장님들처럼,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고전들도 우리에게 자신만의 메시지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고전들을 만나 본 우리는 만남 끝에 닥쳐온 이러한 혼란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 상충하는 메시지의 난립 속에서 또다시 허둥댄다.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해 다양한 고전들을 만났건만, 고전과의 만남이 오히려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 듯한 느낌이다. 혹자는 나에게 힐난의 눈초리를 던지기도 한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고전을 읽으라는 거야?”

고전과의 만남이 야기한 혼란을 수습하자면, 나는 우리가 만난 고전들 중 특별히 어느 하나만을 지지할 생각이 없다. 고전들 간에 우열이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플라톤의 고전과 니체의 고전이 대립하고, 소포클레스의 고전과 카뮈의 고전이 다투고, 카잔자키스의 고전과 밀의 고전이 충돌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다. 고전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메시지 간의 상충은 되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고전들 중에 자신에게 더 적합할 것 같은 고전을 선택해 읽으면 된다. 제임스가 『실용주의』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철학을 선택하라고 제안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저 삶의 방향성을 확립하려는 사람들이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다양한 고전들을 소개한 것이다. 다양한 고전들 중에 정답인 고전은 없다. 자신에게 적합한 고전만이 있을 뿐이다. 절대적으로 맞는 고전은 없지만 자신과 더 잘 맞는 고전은 있다는 말이다. 플라톤의 고전이 마음에 들면 플라톤의 고전을 선택하라. 니체의 고전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니체의 고전을 선택하라. 다양한 고전들 중에서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고전을 읽고, 고전이 제시하는 메시지를 통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면 그것으로 고전 읽기의 목적은 달성된다. 고전의 울림은 우리 영혼의 색채를 선명하게 칠한다.

다만 이것만은 명심해야 한다. 특정한 고전이 자신에게 더 적합하다고 해서 다른 고전들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특히 다른 고전들이 타인의 삶의 방향성과 연계된 상황에서는 더더욱 주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고전을 읽고 지나치게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 외의 고전을 읽는 사람을 무시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실례를 넘어 모욕에 가깝다. 자신이 폄하하는 고전이 타인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이 고전을 선택해 삶의 방향성을 설정했어도 다른 사람은 저 고전을 선택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정답인 고전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고전을 읽은 사람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인 편협함을 경계해야 한다. 고전을 읽은 사람은 고전에 내재된 어마어마한 힘에 매료되어 고전이 제시하는 메시지를 맹신하기 쉽다. 자칫하면 우리는 특정한 고전이 제시하는 메시지만이 옳다고 여기게 된다. 편협함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거대한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고전을 읽었는데 거꾸로 깊은 구덩이 속에 파묻힌 꼴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고전들도 인정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나에게 적합한 고전을 읽어 나만의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되, 다른 고전을 통해 설정된 타인의 삶의 방향성을 무시하지 않는 것. 이것이 고전 읽기에 임하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다. 내가 타인의 삶의 방향성을 존중할 때 타인도 나의 삶의 방향성을 존중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의 영혼의 색채는 뚜렷해진다. 더불어 사회는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타인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해진다. 고전 읽기. 이것은 우리의 영혼과 삶, 사회를 풍성하게 하는 위대한 행위로 다가온다.     



<참고문헌>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2』,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5.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유재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8.

데이비드 흄, 『오성에 관하여』, 이준호 옮김, 서광사, 1994.

르네 데카르트, 『성찰』, 양진호 옮김, 책세상, 201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천병희 옮김, 숲, 2005.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전성우 옮김, 나남, 2007.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강대진 옮김, 민음사, 2009.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시학』, 천병희 옮김, 숲, 2017.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1·2』, 정서웅 옮김, 민음사, 1999.

                          , 『친화력』, 오순희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윌리엄 제임스, 『실용주의』, 정해창 편역, 아카넷, 2008.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장 자크 루소, 『에밀』, 김중현 옮김, 한길사, 2003.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박홍규 옮김, 문예출판사, 2009.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7.

                     ,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

플라톤, 『국가』, 천병희 옮김, 숲, 2013.

        , 『향연』, 천병희 옮김, 숲,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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