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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Jul 20. 2024

나는 고양이일까. 강아지일까.

이름은 칠월이

어제부터 칠월이가 변했다. 배고플 때만 울었는데 배가 부른데도 자꾸 운다. 얼마 전까지 우는 소리도 정말 모기소리만큼 작았는데 이제 제법 소리도 크다. 자꾸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 놀아 달라는 것 같다.


요 며칠 손에서 놀아주고 만져주고 했는데 그렇게 해달라고 하는 것 같다. 손으로 쓰다듬고 놀아주니 벌렁벌렁 드러눕고 좋아한다.


나는 고양이를 키우기 전에 인터넷으로 고양이를 어떻게 키우는지에 대해 알아봤었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고양이는 배변을 잘 가린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고 그루밍하면서 자기 몸을 핥아서 목욕한다."

'고양이는 혼자 두고 외출해도 잘 있는다. 혼자 잘 논다.'였다.


뭔가 강아지 키우는 것보다는 편할 것 같았다. 강아지는 계속 놀아줘야 되고 스킨십을 좋아하고 끊임없이 관심을 줘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강아지보다는 손이 덜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칠월이는 '놀아 달라고 낑낑 대네?'

'그럼 칠월이는 다른 고양이랑 다른가?'생각이 들었다.


오늘 만난 공방언니와 고양이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길고양이들은 야생에서 성장했으니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고 사람에 대한 기대도 없고 거리를 둔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는 키우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주인이 사랑이 많아서 사랑을 많이 주면 사랑을 원하는 고양이가 되는 것이고, 주인이 편하게 키우면 편한 고양이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며칠 나랑 스킨십하고 놀았더니 칠월이도 나에 대한 기대가 생긴 것이다.


'어. 우리 주인은 나랑 잘 놀아주네.'이런 기대.


예전에 티브이에서 봤는데 어느 착한 주인이 강아지를 입양해서 밥도 주고 마당에서 키웠다. 이리저리 파양 됐던 경험이 많은 개였다. 그 주인은 개랑 친해지고 싶고 머리 한 번이라도 쓰다듬고 싶은데 가까이 오기만 하면 으르렁 거린다. 그 주인이랑 산지 삼 년이나 됐는데도 그랬다.


강아지 주인은 그 특성을 존중하고 거리 두고 밥을 주었다.  그 강아지는 그렇게 살아야 편한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과 친근한 스킨십이 어색하고 거리 두기를 원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것은 내 자식에게도 그런 편이다. 내 영역 안에 들어오면 그렇게 피곤하고 불편하다. 잠시라도 혼자 있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그러니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뭔가 불편한 게 있었다. 그러면서도 또 사람을 그리워한다. 나도 나를 종잡을 수 없다. 사랑하지만 스킨십이 어색하고 거리를 두고 싶은 느낌.


엄마와 아홉 살에 헤어지고 아버지랑 거의 방임되다시피 살았다. 거의 길고양이처럼 야생적으로 살았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이제 몸에 밴 이 습관이 그 누구와도 거리를 두는 것이 편해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래도 많이 안아주고 스킨십을 많이 했다. 자라면서 점점 무뚝뚝해지고 스킨십도 현저히 줄어든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아홉 살 이후에 사랑받은 데이터가 없다. 그래서 그럴까 생각이 든다. 그런 내가 자식을 네 명이나 낳았고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칠월이는 어떻게 성장할까? 귀여운 고양이? 활발한 고양이? 시크한 고양이? 사나운 고양이?


나랑 살면서 어떤 고양로 성장할까...


주인한테 받은 사랑의 데이터로 성장해서 어떤 성격으로 프로그램되는 것은, 고양이이건 강아지이건 다를 바 없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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