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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실리 가는 길

덩굴 라일락 향기를 찾아서-#12. 선유실리

by 시를아는아이

”사랑을 승패로 가르는 것은 부질없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사랑에서 승자는 언제나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다.“

_석영중/투르게네프에 대한 글 중에서


1.

버스를 타고 다니던 시절보다는 조금 낫지만, 늘 화진포에서 한 시간 이상 머문 적이 없는 듯해요. 그래서 그곳은 늘 여행의 목적지이면서 동시에 반환점 같은 곳… .

열망하던 연인을 만나고 나면 그다음은 아무래도 좋은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여전히 비밀스러운 혼자만의 여행이다 보니, 아무도 모르게 여행을 마무리하고 싶은 저만의 ‘비밀에 대한 취향’ 탓도 크죠. 숨어들듯이 혹은 스며들듯이 하루를 보내는 잠행 같은 하루 여행에 대한 은밀한 쾌락 같은 거… . 그래서 늘 시간에 대한 강박감 같은 것이 있고 오히려 그 때문에 긴장감과 해방감이 묘하게 교차했던 듯해요.

그런데 이번 화진포행의 큰 루트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수정한 행로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한두 가지 있었어요. 그것도 어쩌면 이런 여행의 소소한 재미라고 불러야겠죠.


2.

그보다 먼저 약간 아쉬운 것은 미시령 터널이 생기면서 옛길을 넘던 시절보다 동해바다와 울산바위를 만나는 순간이 약간은 싱거워졌다는 점이에요.

구불거리는 고개를 버스로 힘겹게 넘으면 갑자기 멀리 눈 앞에 펼쳐지던 동해바다와 창밖으로 손만 뻗으면 닿을 듯 우뚝 솟아있는 울산바위의 모습을, 적어도 그처럼 드라마틱고 장엄하게 경험하기는 어려워졌다는 거예요.

이런 점을 고려했는지 언제부터인가 터널을 지나 속초 시내로 진입하기 직전 왼쪽에 ‘울산바위 촬영소’라는 휴게소가 생겼더군요.

그런데 한두 해 전 화장실에 들를 겸 좌회전해서 그곳에 갔었는데, 웬걸 기대와 달리 찾는 사람 아무도 없이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어서 조금 황당했던 기억이 있어요.

잠시 멈추어 일부러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울산바위를 보고 싶기는 해도,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굳이 ‘바위 하나’(?) 보기 위해 길 건너에 차를 세우기는 조금 불편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족이나 다른 동반자가 있다면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차라리 오른쪽 도로가에 규모를 조금 줄여서 졸음쉼터 크기 정도로 ‘촬영소’를 만들었다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내 영혼의 ‘성지’ 동해바다를 지키는 멋진 금강역사 같은 울산바위에게 잠시 가벼운 인사라도 하고 나의 ‘화진포 순례’를 시작하고픈 작은 바람 같은 것이 있어서… .


3.

이번에는 여행 루트에서 가까운데도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속초 등대 전망대’를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로 삼았어요.

전에는 아침에 출발하면 점심 무렵이라 우선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장소를 찾다 보니, 일단 거의 폐쇄 수준인 ‘속초 국제 여객 터미널’ 주차장에 먼저 주차를 하고는 했었거든요. 물론 근처 ’영금정‘에 곧장 들른 적도 있고, 부근 ‘등대 해수욕장‘ 앞의 주차장에 주차를 하기도 했죠.

그런데 늘 점심은 ’의령식당‘의 회냉면이었요. 이 글을 쓰면서 20년만에(?!) 사전에서 ‘회냉면’을 찾아보니 ‘홍어회 무침을 꾸미로 얹어서 먹는 비빔냉면. 함경도의 향토 요리.’라고 나오네요.

아, 그렇구나… . 늘, 이름에 ‘회’가 들어가는데 흔히 아는 회가 아닌 홍어 무침 같은 것이 토핑처럼 나오는지 한편으로 궁금했던 것 같아요. 평소 궁금해도 꾹- 참는 성격이라… .

그리고 속초는 실향민들의 마을인 ’아바이 마을‘도 있듯이 이북하고 관련이 깊고, 분명 음식 이름은 북녘 느낌인데 식당 이름은 남쪽 지명(의령)이 들어가 있는지도 의아했었죠. 최근에는 아들인 듯한 분이 깔끔하게 리모델링해서 운영하고 있지만 아마 처음 가게를 연 어머니의 택호로 짐작이 가지만… .


4.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망대’를 목적지로 찍었지만, 결과적으로 점심이 살짝 늦어져서 왼쪽에 전망대를 끼고 멀리 바다와 눈인사만 하고 예전처럼 등대 해수욕장 앞에 주차… .

그날 서울 쪽은 흐린 날씨였는데, 속초 등 동해는 본격적으로 비가 오고 있었죠. 마침 월요일이라 우산을 쓴 몇 사람이 방파제를 서성이며 비 내리는 바다와 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 기대했던 대로 한산한 풍경이었죠. 이번에도 가지 못한 속초 등대 전망대 쪽을 바라보니 그 바로 아래 해변의 예쁜 갈색 바위 위로 높은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죠.

정다운 바다를 잠시 뒤로 하고 칼칼하고 개운한 회냉면을 그리면서 근처 의령식당으로 향했죠. 아뿔싸! 그런데 그날이 마침 정기 휴무일… . 월요일에 여행하는 사람들은 늘 이런 리스크(?)가 있죠! 아쉽지만 그날은 근처 중국집에서 새우볶음밥으로 해결… .


5.

늘 그렇듯이 살짝 늦은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 사서 서서히 7번 국도를 타고 북쪽(N)으로 향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본격적으로 설레는 순례를 시작하는 느낌이 들어요.

청간정, 아야진항, 가진항, 간성읍, 대대리, 반암 그리고 거진항… . 거진항을 왼쪽에 끼고 해안도로로 가다가 잠시 바다와 헤어지고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비로소 일상속에서도 가끔씩 의식의 흐름처럼 떠오르던 화진포… .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막상 화진포에 도착하면 늘 버스든 차로 가든 시간이 별로 없어서 길어야 한 시간 정도밖에 머물지 못했죠. 그리고 해수욕장 앞에 도착해서는 정작 바다로 곧장 가지 않고 늘 왼쪽 초도항 쪽으로 가서 등대와 섬, 잎이 대바늘처럼 크고 억센 언덕의 해송, 그리고 그 해송들 사이로 보이는 바다를 보거나 멀리 해변과 절벽을 보며 꿈속을 걷듯이 산책하는 것이 전부… . 그래도 이번에는 정답게 비가 와서 화진포가 더 사랑스러웠죠.


6.

그리고 이제 나의 비공식 순례 여행은 왔던 길을 되짚어 가다가 간성을 지나쳐서 진부령으로… . 백두대간의 창자처럼 계곡을 따라 구불거리는 진부령을 한참 오르면 이윽고 정상에는 최근 새로운 순례지가 된 예쁜 커피숍이 하나 있죠. 흘리 커피라는… .

지금은 폐쇄된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 입구에 있는데 건물 정면은 마치 큼직한 ‘ㅅ’을높이 세운 듯한 모습이 마치 눈 많이 오는 스위스 어느 산골에 있어도 제법 어울릴 듯한 모습이죠.

커피숍 안은 온갖 피규어들이 가득해서 처음 문을 연 주인의 독특한 취향이 궁금해지는 인테리어… . 하지만 사실상 마지막 목적지다 보니 커피 한 잔 사서 밖에 잠시 서성이며 주변을 둘러 보고 아쉽지만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아쉬운 쉼표 같은 곳이죠.

그런데 지금은 거의 인적조차 끊어진 길 건너 옛 스키장 가는 길을 눈으로 쫓다 보면, 그 시절이 한바탕 꿈만 같다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고는 해요. 정말 스키장 근처에는 ‘선유실리’라는 설화에 나올 법한 화전민들의 마을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죠.

선유실리는 1993~1995년, 선유실리 계곡에서 시작된 남천이 막사 옆 물푸레나무 그늘을 지나 탑동, 간성을 스치듯이 지나 연어가 회귀하는 바다에 이른다는 신화 아닌 신화를 꿈꾸며 푸른 제복을 입고 막막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해요.

그래서 내게 화진포 순례는 세상이라는 드넓은 바다로 떠났던 ‘연어’가 푸르른 시절의 고장으로 가끔씩 회귀하는 시간 여행이기도 해요.


7.

언젠가 문득 선유실리에 대해서 추억하면서 느닷없는 깨달음처럼 떠오르던 질문이 하나 있어요.


’그때 그 시절, 정말 그곳에 선유실리가 있었을까?‘


그 시절 선유실리처럼, 한 해 전 덩굴 라일락 향기에 취해 어느 한 사람을 향하던 그 시간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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