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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jiin Sep 30. 2024

비워진 캐리어

부족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



‘좋은 거, 익숙한 거’



탈린에서 마지막 밤, 저녁은 구시가지 근처 맥주펍에서 해결하고 들어왔다. 독일식 맥주를 판매하는 대형 호프집이었다. 당시만 해도 부엉이에게 여행의 낭만은 맥주로 통했던 때였다. 모든 일정을 나에게 맞춰 준 부엉이에게 보답할 길을 역시 맥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껏’, ‘원하는 만큼’, ‘먹고 싶은 걸로’라는 말이 쏟아지자 부엉이는 정신없이 메뉴판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엉이가 선택한 메뉴는 독일식 족발 요일인 ‘학센’과 일곱 가지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세트 메뉴였다. 나에게 행복이 유지되는 시간이 있다면, 아마 메뉴판을 여는 순간부터 맥주잔이 우리 테이블 위에 놓이는 그 순간까지 일 거다. 어떻게 보면 짧을 수 있지만, 그 이상 행복을 유지하려면 또 다른 에너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맥주가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절정에 다다른 행복이 끝났다. 종류별로 맥주맛을 음미하며 이미 나와는 다른 세계에 빠져있는 부엉이가 보였다. 어쩐지 그런 부엉이를 보고 있으니 나는 남들보다 행복 유지 기간이 짧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으로 독일식 족발인 학센을 먹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빠르게 다른 길로 걷기 시작했다. 부엉이가 바삭함이라고 느낀 껍질은 내게는 딱딱했고, 짭짤하다고 얘기한 학센은 나에게 그냥 짠 음식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학센은 부엉이가 해치우고, 나는 그 옆에 같이 나온 으깬 감자를 안주 삼아 먹어야만 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들고 싶었다. 배가 고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냉장고를 뒤져 내일 먹을 빵을 미리 먹으며 안전한 맛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찾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본능 앞에서 여과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난히도 맑았던 마지막 날 아침, 맛집을 찾았냐는 부엉이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한껏 들떠 있었다. 


‘응, 좋아하고, 익숙한 거’











‘부족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맛집의 위치는 올드 타운 안에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 일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작은 캐리어 하나를 비워야 했다. 작은 캐리어라고 해도 담겨있던 짐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노트북 가방까지 가져와 덜어낼 수 있을 만큼 짐들을 덜어냈다.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공간이 보일 때까지 덜어내고, 또 덜어냈다. 그렇게 빈 캐리어를 들고 우리가 향한 곳은 숙소 근처 마트였다. 목적이 정확하니 우리의 걸음은 명확했고, 빨랐다. 거침없던 걸음이 멈춰 선 곳은 맥주코너였다. 우리는 눈빛을 한 번 주고받은 뒷 배고픈 캐리어에게 줄 수 있을 만큼 맥주를 가득 담았다.


헬싱키 물가가 워낙 고물가인데 특히 맥주값이 비싸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핀란드 국민들도 하루를 날 잡아 탈린으로 넘어와 맥주를 사갈 정도라고 했다. 계산을 마친 우리는 맥주를 캐리어로 옮겨 담았고, 묵직해진 캐리어의 무게에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도대체 우리는 남은 5일 동안 맥주를 얼마나 마실 생각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누가 봐도 비합리적인 소비였지만, 당시 우리는 아주 합리적인 소비였다며 서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돌아오는 크루즈 안에서 맥주를 박스로 사가는 핀란드 사람들을 보면서 아쉬워하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결핍의 중요함을 잊었다. 넘쳐나면 만족스러울 줄 알았지만,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남은 맥주를 소비하기 위해 낮부터 맥주를 꺼내 마셔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부족함이 주는 공백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지금 나는 술을 끊은 지 2년이 되어간다. 물론 부엉이도 함께 술을 끊었다. 우리의 금주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가끔 끝이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그 마지막을 상상할 뿐이다.








‘언젠가 다시 술을 마시게 된다면 내 앞에는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공기가 차가워지는 10월이면 더 좋겠고,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여행 중이고,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지금이구나’ 이런 느낌으로 

각자 마시고 싶은 술을 사 오는 거야. 

지금은 아주 맛있는 레드 와인을 마시고 싶어. 

그렇게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면 정말 황홀할 거 같아’











'‘채워 넣어야 할 것들’



맥주로 인해 어느새 짐이 아닌 돌덩어리로 변해버린 캐리어를 들고, 올드 타운을 방문하려니 전날 걸었던 울통 불퉁한 돌길이 떠올랐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바꿔 여객터미널로 몸을 돌렸다. 사물함에 캐리어를 넣고 나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서둘러 식당에 방문했는데, 탈린에서도 이미 유명한 식당이라 예약이 필수라는 사실을 입구에서 알게 되었다. 오늘 예약이 끝났다는 말에 세상이 무너질 거 같은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내 표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나가려던 우리를 점원이 다시 불렀다. 근처에 2호점이 있는데, 메뉴가 똑같으니 거기서 식사를 해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당신처럼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눈빛으로 내 마음을 대신 전하고 서둘러 2호점을 찾아 나섰다. 점원이 그려준 지도 덕분에 5분 만에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점원 말대로 식당에는 자리가 있었고, 익숙한 음식 냄새에 내적 환호를 질렀다. 이번에는 나의 행복 유지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2호점을 찾아오는 길부터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는 그 순간에도 즐거움이 넘치고 있었다. 배고픔 때문인지 즐거움에 비해 메뉴 결정은 너무도 쉬웠다. 좋아하고, 익숙한 음식. 내가 선택한 음식은 연어 요리와 호박 수프였다. 부엉이는 연어 요리는 이해하는데 왜 하필 호박 수프를 주문했는지 궁금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집에서 주로 해 먹는 음식 중 하나가 단호박 수프였다. 겨울이면 거의 매일 먹는다고 봐야 할 정도로 자주 해 먹었던 음식이었다. 나는 일단 날이 쌀쌀하니 몸을 녹이고 싶었고, 호박은 달달한 식재료니 실패할 확률이 적다고 했다. 그리고 경험도 좋지만, 휴식도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 나에게는 경계심 없이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하고 했다. 음식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감탄사가 적은 내가 먹는 동안 몇 번을 감탄하며 먹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 먹었던 호박 수프가 여태 먹었던 호박 수프 중 가장 맛있었다고 종종 얘기를 한다. 그때마다 부엉이는 ‘맛있었지, 근데 그때 넌 너무 굶주려 있었어’라고 말하곤 한다. 








풍족에 취해 있다 보면 가끔 내가 좋아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때가 많다. 해소되지 않은 갈증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결국 덜어내고, 비워내야만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비워놓고 보니 채워 넣고 싶은 것들이 신중해졌다. 고르고 골라 정말 좋아하는 것인지, 꼭 함께 가야만 하는 것인지 조심스레 채워 넣고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캐리에는 더 이상 맥주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져버렸다. 











맥주펍

Beer House

주소: Dunkri 5, 10123 Tallinn, 에스토니아


탈린 레스토랑 

Restaurant Rataskaevu 16

주소: Rataskaevu tn 16, 10123 Tallinn, 에스토니아


Väike-rataskaevu

주소 : Niguliste 6, 10123 Tallinn, 에스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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