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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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적, 직무적 특성상 제 주위에는 크리에이티브 한 분들이 많습니다. 가끔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풀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본인의 생각을 뛰어난 결과물로 표현해 내는 분들도 많이 계시죠. 그럴 땐 좋은 인풋과 자극을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늘 긴장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제가 하는 일에 더 큰 애착도 느낄 수 있어 여러모로 운이 좋다고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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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든 것에는 장단이 존재하듯이 크리에이티브 한 사람들에게도 단점은 존재합니다. 물론 이 역시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마냥 일반화하기 어렵고, 마치 수박의 씨처럼 큰 장점들 속에 콕콕 박혀있는 작디작은 부분일지 모르기에 조심스러운 맘이 앞서지만 때로는 부족한 포인트를 짚고 넘어가는 것도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크리에이티브 한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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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주의해야 할 부분은 '뭔가 설명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습성'입니다. 크리에이티브 한 사람들 중에는 후천적으로 길러진 역량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분명 타고난 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경우 자신이 가진 능력을 빠르게 결과물로 전화할 수 있는 역량이 크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 과정을 잘 설명해 주거나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상하다. 왜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못하지?'라는 생각으로 그냥 본인이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경향까지 보이고 말죠. 이건 예술가에겐 탁월함일지 모르지만 협업을 해야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꽤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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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성향은 '프로세스나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보이는 것으로 발현되기도 합니다. 본인들에겐 좋은 과정을 만들어 놓는 것, 다른 사람이나 뒤따라오는 후배들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공유하는 것보다 우선 멋진 결과물을 창작해 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물론 프로세스나 툴, 시스템 등이 그런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효율화와 내재화라는 측면에서는 크리에이티브도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출 필요는 반드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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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이게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창의적인 사람들의 경우 본인이 확신하는 영감이 올 때까지 스스로 작업에 딜레이를 거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고자 조금이라도 더 디테일을 붙잡고 있고자 하는 과정에서 데드라인을 못 맞추는 경우가 빈번해진다는 것이죠. 저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무한 존경할 수 없는 유일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데드라인을 못 맞추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는데, 조직에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말해 무엇할까요... 일정이 지나고 나면 크리에이티브도 크리에이티브할 수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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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바로 '다름을 위한 다름'입니다. 이건 어느 정도 예상하실 수 있겠지만 크리에이티브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큽니다. 물론 이 자체로도 훌륭한 자질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때로는 이런 기질이 기존의 작업물과 무조건 다른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그래서 심지어 자신이 담당한 작업물마저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며 모두 레거시로 만들어버리는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늘 새로워야 한다는 것도 과거에 대한 명확한 회고와 가치 판단에 따른 것이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되는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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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단점을 열거해 봤지만 저는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딱 하나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내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개념을 곧바로 작업물로 옮기기 전에 꼭 이 변환의 과정을 공통의 언어로 기록하는 것이죠. 쉽게 설명하자면 A라는 생각이 어떻게 B라는 과정으로 옮겨졌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인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의 구조를 만들어 놓는 것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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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함께 협업하는 사람들이 봤을 때 우리는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에 대해 의견을 모으거나 반론을 제시할 수 있고 또 다른 작업을 이어갈 때 무엇을 참고하고 무엇을 디벨롭 할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귀찮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이 과정을 생략하면 함께 일하는 누군가는 매번 맨땅에 헤딩하듯 처음부터 새로 고민하고 다시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만큼 비효율적인 것도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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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본인이 되었건 아니면 함께 일하는 주위의 누군가이건 간에 크리에이티브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장점에 비해 단점 역시 명확히 인지하고 이를 잘 보완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함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 역시 '크리에이티브 한 사람은 이런 단점이 있습니다'라는 의미가 아닌 '크리에이티브를 추구하다 보면 이런 함정에 쉽게 빠질 수도 있습니다'라는 것이니 비판 모드보다는 주의 모드로 인지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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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함께 일하던 디자이너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격일제로 크리에이티브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월, 수, 금은 희번뜩한 영감을 막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고 화, 목에는 그걸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바라볼 수 있는 메타인지를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거든요."
듣고 나서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나지만 저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자질을 가진 인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욕심과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아는 통찰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밸런스를 잘 잡아가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에 어쩌면 좋은 영감이 더 많이, 더 자주 찾아가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