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화를 좋아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만화를 좋아한다.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가상의 세계에서 활보하는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복잡한 생각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살짝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 전개 방식은 만화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만화 속 인물들의 모험은 어른인 나의 눈에도 꽤나 흥미진진하다.
그런 나에게 니켈로디언 코리아의 폐국 소식은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니켈로디언이 사라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 니켈로디언에서 시청했던 만화를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나는 만화 채널 중에 니켈로디언을 가장 선호했고 니켈로디언에서 방영하는 대부분의 만화를 좋아했다. 급하게 검색을 하니 일부 작품들은 다른 플랫폼이나 채널에서 볼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지만 허탈하긴 마찬가지였다.
눈물겨운 나의 사연을 들은 친구들은 정말 하찮은 슬픔이라며 나를 비웃었다. 설마 울었냐는 질문에(사실 집에서 조금 울긴 했지만) 나는 절대 아니라며 극구 부인했다. 아무도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니 우울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삶은 크고 작은 슬픔의 연속이다. 우울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과 슬픔을 나누며 마음을 다잡는다. 슬픔은 나눌수록 줄어든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언어와 다정한 행동이 상처의 악화를 막고 회복을 돕는다.
물론 슬픔의 크기와 무게는 상대적인 것이나 그래도 어느 정도의 구분 지점은 존재할 것이다. 적당한 크기의 슬픔은 사람들과 나누면 줄어들지만, 거대한 크기의 슬픔은 사람들과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슬픔은 애초에 누군가에게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뿐더러 누구나 보편적으로 겪는 일이 아니기에 공감을 얻기도 힘들다.
감정의 밑바닥으로 침몰한 상처와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보듬을 수 있는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슬픈 일을 겪었다고 해서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통곡하며 지내는 것은 아니다. 올라갔다 내려가는 감정 변화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는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의 그래프를 잘 파악해야 대처가 가능하다. 잠시 휴직을 하거나, 가까운 사람들과 아픔을 나누거나,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거나, 전문의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 것 모두 당연히 도움이 되겠지만 마음 회복의 주체는 언제나 내가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사람들은 깊은 상실감에 아파한다. 반려동물이 사용했던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옷이나 담요는 일부러 세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반려동물이 남긴 마지막 생의 흔적에 매달린다. 그것만이 떠나간 반려동물을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모두 정리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침대와 장난감에 묻은 털을 쓰다듬으며 사랑한다 말했고, 투병 생활 때 사용했던 반려동물 체온계와 바늘 없는 주사기(물과 음식을 입 안으로 조금씩 넣어 주는 용도로 사용했다)를 만지며 미안하다 말했다.
구름이가 떠나고 처음 몇 개월은 무기력증이 너무 심해서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누워만 있었다. 모든 기력이 소진된 상태였기 때문에 씻고, 밥을 먹고, 옷을 입는 일상적인 움직임마저도 너무 힘이 들었다. 가슴에 묻는다는 말의 의미를 절실히 실감했다. 이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맡겼다.
어느덧 구름이가 떠난 지 10년이 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이 편해지고 충만해졌다. 고통으로 가득했던 애도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고, 그 과정의 주체는 내가 되어야 한다.
반려동물 상실 증후군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보호자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 당신의 모든 순간과 모든 과정이 순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한 생명의 마지막을 지킨다는 건 많은 정신적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다. 그것을 해낸 당신은 이미 단단한 사람이다. 충분히 애도하고 잘 보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지개다리를 건넌 우리의 반려동물이 원하는 것도 그런 것들이 아닐까? 보호자가 물리적 이별을 받아들이고 남은 삶을 잘 살아가는 것, 삶의 고비가 올 때마다 자신을 생각하며 힘을 내는 것,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희미해져도 문득 떠오를 때마다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존재로 남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