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화의 심각함을 아시나요?
처음 놀러 온 지인이 통찰력 좋게 말했다.
“우와… 통창? 너 혹시 관음증은 아니지?”
통창 너머로 이웃의 일상이 훤히 보였고, 당연히 나도 이웃에게 나의 일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제야 현실이 보였다. 그 뒤 우리 집 블라인드가 완전히 열리는 일이 없었다.
햇빛도 다시 잘 들어오지 않았다.
빛을 차단하니 집안은 서늘해졌다. 그렇다고 관음증을 무시하고 열면, 한낮의 태양이 집안을 뜨겁게 달궜다. ‘여느냐, 마느냐’ 갈등이 시작됐다. 여름이 지나가면 괜찮겠지 했지만, 겨울이 오니 오히려 보일러가 문제였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보일러실 창문을 닫아달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보일러실 난방이 안 되고 완전히 밀폐되지 않는 격자 창문이 있어서, 매년 동파로 고생하는 집이 나온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옆집과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가끔 참기 힘들었다. 복도형 오피스텔이다 보니 동굴처럼 울린다.
“쿵-쿵-쿵-쿵-“
가끔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릴 때면 공포를 넘어, 두통에 시달린다. 그나마 다행은 복도 끝 집이라 우리 집까지 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 안에 ‘쿵쿵’의 범인이 있는 것이 함정이지만. 한 번은 ‘쿵쿵’의 집에서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나의 몹쓸 상상력은 ‘혹시… 쿵쿵이 때리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하며 관리사무소에 신고했었다.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면서. 그렇게 치면 나도 썩 좋은 이웃은 아니었으면서. 이렇게 사람은 자신은 잘 모른다.
내가 좋은 이웃이 아닌 이유는, 바로 방음 때문이다. 옆집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사생활 보호에 취약했다. 평소 조용한 것을 좋아하지 않던 나 때문에, 우리 집은 늦게까지 음악이나 TV 소리가 항상 켜져 있었다. 제 역할을 못 하는 무능한 벽 때문에, 옆집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집에 이사 온 거지?’
가끔 어떤 일을 하다,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왜 이랬지?’하고 나에게 묻는 순간 말이다.
분명 이유는 있었다. 그런데 막상 떠올리려고 하면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사막의 뜨거운 열기에 피어난 아지랑이 사이로 보는 오아시스처럼, 아련하게 느낌만 남아있다.
사막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아시스를 탐했을까?
왜 이것을 원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럼 간절함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진심으로 원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마음이 사막처럼 메말라서, 오아시스를 탐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친한 친구가 하는 것을 보니 멋지고, 싫어하는 녀석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샘이 난다.
그리고 그런 녀석이 내게 “그것도 없어?”하고 말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그때의 오피스텔은 반지하라는 이유로 인해 먼지처럼 상해버린 유리 같은 자존감에, 단비 같은 보상이었다. 사막에 단비가 내리면, 순간은 촉촉하게 적셔진다. 하지만 비옥한 땅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면, 사막은 내가 만든 것 같았다.
여러 번 이사 다니던 시절, 마지막으로 만난 반지하는 내게 낭만이 있었다.
물론 앞서 경험했던 모든 단점들을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잊힌 만큼 가슴 뭉클한 추억이 깃들었을 뿐이다.
반지하 치고 넓게 난 창문은 물막이를 하고도 내게 찬란하게 아름다운 빛을 선물했다. 벽을 타고 넘어온 빛이 다시 물막이를 건너 방 안으로 들어오면, 은은하게 방안을 감싸 앉는다. 오히려 그 은은한 빛이 좋았다.
“타다-닥-타다-닥”
바닥을 치고 뛰어올랐으나, 물막이판에 가로막혀 떨어지던 빗물의 연주 소리도 여전했다. 창문과는 다른 리듬을 만들어내며, 한낮의 나른함을 불러온다.
적당한 어둠과 자연이 선물한 음률을 들으며 즐기는 한낮의 낮잠. 마치 내가 부자가 되어 큰 사치라도 부리는 듯, 큰 행복을 선물 받았다.
결국 반지하는 타인의 시선을 배제하고 보면 불편할 뿐이지, 불쌍한 것도 불행한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추억과 행복, 반갑지 않은 이웃이 많은 곳이었다. 그 이웃이 곰팡이고 벌레들이란 것이 문제지만, 어디든 그렇다. 남의집살이에 완벽한 집이란 없다.
결국은 타인의 말과 시선에 흔들린 내가 좋은 기억은 모두 저 구석에 처박고,
내가 만든 행복의 가치는 부끄러운 듯 꾸깃꾸깃 접어 숨겨버렸던 것이다.
세상과 타인의 시선에 맞춰 그것이 나의 가치라 속이며, 열심히 타인의 길을 달리며 뒤쳐진 내 마음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쫓아가려 속도를 내면 낼수록 심해지는 갈증에, 오아시스가 간절해졌다. 그렇게 아지랑이 뒤 오아시스만 바라보며 달리다 보니, 넘어진 것이다.
한 번 넘어지니 일어날 힘이 생기지 않았다. 아니 ‘왜’ 일어나야 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어느새 저 오아시스가 진짜인지 중요해지지 않았다. 정말 내게 오아시스가 필요한지 생각하게 됐다.
나도 살다 보니, 몸에 밴 무의식으로 타인의 가치를 무시한 적이 있다.
“이게 좋아? 안 불편해?”
“불편해. 그래도 좋아. 아니 그래서 더 좋아. 너무 편한 것보다 매력적이지 않아?”
녀석의 당당함에, 오피스텔로도 쉬이 적셔지지 않던 사막에, 간절히 기다리던 폭우가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의 행복의 가치를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으로 나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말해야 했다.
“어떻게 살긴, 잘 살지. 나한테는 너무 좋아. 너도 잘 살고 있지?”
그리고 또 말해야 했다.
“어떻게! 우리 오피스텔 모두 관음증인가 봐! 그럼 나도 위험한데?”
아주 오래 살아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시간을 견디어보니, 경험이 주는 것들이 있다.
타인의 시선과 말은 날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지만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 무엇도 나를 흔들 수 없다.
날 흔들고 바꾸는 것은 결국 나다. 흔들린 나뭇잎이 햇빛을 잘게 부수고 그늘을 선물하지만, 뿌리에게 이동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뿌리도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겠지만, 그 자리에 있을 것을 믿는다. 나도 그래야 했다. 땅에 깊게 뿌리내린 나무처럼, 나의 가치를 확고히 세우면 된다. 그럼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수많은 나무들로 사막 따위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반지하를 살던 내가 오롯하게 서있었다면, 행복을 인정하고 오피스텔로 이사 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블라인드는 반만 쳤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내 결정의 가치를 믿지 않고, 타인의 가치를 쫓아왔기 때문에.
‘도대체 내가 왜 이 집에 이사 온 거지?’
그때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 외 다른 이유들도 있을 것이다. 인생은 한 가지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으니까.
다만, 해야 할 일 하나는 확실하다. 사막을 다시 온전한 땅으로 만들 때가 되었다. 아직도 숲을 찾지 못한 나의 사막은, 그 사이 심은 몇 그루의 묘목만이 버티고 있다.
이제부터 사막을 온전한 한 땅으로 만들고, 땅 위에 호수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더 많은 나무를 심어, 깊은 뿌리를 만들어야 한다. 나무 한 그루에 나의 가치 하나를, 호수의 넓이만큼 나에 대한 믿음을 담으며. 그렇게 비옥한 땅을 일굴 것이다.
물론 관리가 느슨해지면 또 사막이 되어 뿌리가 흔들릴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되돌릴 힘이 남아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겁먹지 말고 다시 시작하자
난 또 기억해 낼 테니까. 이 사막이 신기루라는 것을. 설사 사막이라도, 멋진 사막일 것이라고. 요즘 사막도 관광지가 될 만큼 아름다우니까.
또 이사를 앞두고 있다. 이번에는 어떤 집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이제는 어떤 집을 만나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응, 좋아! 아주 좋아”
층간 소음만 없다면.
“타닥-타닥-타닥-”
더운 여름 오늘도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손님이 찾아오길 기다린다.
오늘 하루 너무 무덥지는 않으셨나요?
그럼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