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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May 24. 2020

노무현 없는 노무현의 시대

그러나 그는 죽어서도 죽지 않는, 노무현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떠나던 날과 나

2009년 5월 23일은 11주기 오늘과 같은 토요일이었다. 갓 대학생이 된 나는 그 날 늦잠을 잤다. 이른 점심에 깨어나서 소식을 들었다. 대통령 노무현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며칠 동안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지금 분노하는가 그저 황망한가? 너무나 충격이 커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난 날 대통령 아옌데가 서거했다.

그러다 글을 적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닌, 스스로 쓴 최초의 '사회적인' 글로 기억한다. 요지는 대충 쿠데타에 맞서다 죽은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와 노무현의 삶과 운명이 닮아있다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나는 아옌데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그의 이야기와 흑백 사진 몇 장을 본 것이 전부였을 뿐이었다. 흑백 사진으로 남은 아옌데는 거악에 맞서 투쟁하다 산화한 영웅의 이미지였다. 어린 청년 시기 영웅이 필요한 나는 남들이 체 게바라의 유명한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리듯, 지구 반대편 아옌데를 영웅으로 생각했다. 내게 그는 포스터 속 락스타 같았달까. 준열한 정신으로 가치를 지키다 죽은 용기 있는 초인. 이제 막 10대를 벗어난 내게는 그 사람이 참 멋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노무현은 흑백사진이 아니었다. 생동하고 목소리가 있는 살아있는 존재였다. 그의 떠남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대통령의 노제가 열린 시청 앞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아직 서울로 가는 길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그 자리에 가지 못했다. 방구석에서 이유를 모르게 그저 노여워하고 슬퍼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이제는 그 서글픔과 노여움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영웅이 아닌 너무나 '사람다운 사람'이었던 탓이다.


시대를 정의하는 신화와 상징

언제나 인간은 그 시대에 맞는 신화와 상징을 필요로 했다.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 피노체트 치하에서 칠레인들은 아옌데를 투쟁의 상징으로, '영웅'으로 받아들였다. 투쟁할 마왕이 있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마왕에 맞섰던 용감한 영웅의 이야기에 천착한다. 하지만 영웅들은 어쩌면 너무나 비범해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저 멀리의 존재 같다. 닿을 수 없고 될 수 없는 존재인 영웅들.  


산업화 시대 카리스마적 리더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였다. 산업화 신화 속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알고 있는 초인이었고, 혼자서도 능히 사회를 전진시키는 영웅이었다. 그들의 카리스마와 이야기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신화가 되었으며, 그들 자신도 그들이 대표하는 이야기의 상징이었다.

고성장기 산업화를 대표하는 대통령 박정희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그러했다. 그는 한국의 고성장기 초에 집권했고 80년대가 열리기 직전 죽음으로 퇴장했다. 그에게는 크게 두 가지 명암이 있다. '민주주의 가치 탄압과 인권을 짓밟았던 독재자', '가난한 한국을 산업화로 이끈 지도자.' 그에 대한 판단이 어느 쪽에 가깝든 박정희는 '힘'과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으며 국민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아무튼 박정희는 그가 대통령이었던 시대를 '산업화'의 시대로 보고 싶은 이들에게 영웅적이고 초인적인 상징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되어야만 했기에 '인간' 박정희는 '계몽군주'가 백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시혜적인 면모가 돋보일 뿐, 우리와 같은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은 아닌 듯하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간혹 '미담' 형태로 몇몇 이야기가 회자될 뿐 같은 공간에서 살아 숨 쉬던 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사는 초인이고 영웅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궁정동에서 했던 일들은 당대에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대중 일반도 그다지 중요한 흠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 같다.)


현대 그룹의 창업주 정주영

또 다른 산업시대의 상징은 기업인 정주영이었다. '왕 회장'님은 혈혈단신으로 기업을 일으키고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거북선이 그려진 동전을 놓고 선박 건조 계약을 따냈다는 이야기나 안 되는 것이 있을 때 "이봐 해봤어?"라고 물었다는 설화는 산업화 시대와 정주영을 각인시킨다. 또 경부고속도로를 초단기에 완공했다는 전설은 박정희, 정주영이라는 상징을 만나 카리스마를 더한다.


물론 그 시대는 지금보다 살기 어렵고 가난했다. 또 민주주의는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고, 지상과제였던 산업화를 이유로 희생된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투쟁과 민중의 서사는 산업화와 그 상징들이 만들어낸 만큼 '보통 시민들'에게 강력한 각인을 남기기 쉽지가 않았다. 당대에도 그랬을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 세대 평범한 시민들에게 물었을 때, 절대다수는 '전태일', 젊은 날의 '김대중' 이외에 다른 상징을 떠올리기 어려워할 것이다.(김민기를 떠올릴 수 있다면 이미 그는 우리 세대 일반의 범주는 아득히 벗어나 있다.) 그만큼 박정희와 정주영 신화의 초인적, 영웅적 존재는 그 시대를 '산업화'로 인상을 남길 만큼 대단히 강력한 것이다.  대통령 박정희, 기업인 정주영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산업화 시대로 정의 내리게 하는 '상징'이었다.


(오죽하면 그 시기 기업인들을 다룬 훗날 드라마의 제목이 '영웅시대'가 되었겠나. 실제로 그 인물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산업화 신화 속에서 그들은 초인이다. )


문득 사람 노무현을 생각한다.  

노무현은 새 시대에 가장 가까이에 떠오르는 옛사람이다. 이제는 세상에 없기에 그는 '옛사람'이다. 노무현의 삶은 크게 3부 구성 같다. <대통령이 되기 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이후부터 떠나기 전까지>. 90년생인 나는 그가 치열히 투쟁했던 독재 정권 시절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의 삶과 그가 지난 시대를 감히 평하기도 조심스럽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를 생각하면 흑백이 아닌 컬러로, 멈춰있는 장면보다는 아닌 생동하는 영상이 떠오른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린다. 대통령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던 사람으로 생각이 난다. 

3당 합당을 반대하는 노무현 의원(1990)

문득 '노무현' 하면 떠오르는 낱말, 짧은 구문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다.

실패, 좌절, 안타까움, 치열함, 함성, 마음의 빚, 함께하지 못함, 상실, 미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역부족, 화끈함, 역동성, 포기하지 않음, 그리움, 도전, 결기...

그를 생각하다보면 어찌 보면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단어들이 교차하며 떠오른다. 정말 그렇다. 나는 노무현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다가도 눈물이 나다가도 결국엔 그리워진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말한 대로 노무현의 시대는 오더라도 그 자리에 노무현은 없는 탓이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 질 때까지 그를 끝내 만나보지 못했던 탓이다.

노무현은 산업화 신화의 영웅들처럼, 무오류의 초인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인물이다. 흑백 사진 속 추앙받는 영웅이 아니었다. 출세하고 싶어서 공부했고, 판사가 되었다가 변호사 생활을 하다 돈을 좀 벌었던, 어쩌다 있음 직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권력이 억압하던 이들을 목도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이건 아닌데..." 그들 앞에서 변호사 노무현은 각성했다. 깨어질 줄 알면서도 들이받았다. 야합을 마주할 때는 저항했고, 통합을 위해서는 헌신했다. 세상에 맞서 좌절해도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깎이고 부서지다 노무현은 그를 열망하는 시대정신의 파도를 타고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정치인 노무현은 실수도 했고 모든 것을 다 잘해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보면 정치인 노무현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패하지도 않았다. 노무현은 '선출된 왕'과 같았던 대통령이 사실은 우리와 같은 시민민임을 온몸으로 증명한 사람이었다. 대통령 이후의 노무현을, 다시 시민 속으로 돌아온 노무현을 사람들은 참 좋아했다. 노무현이 싸우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노무현이 믿는 가치를, 그를 타락시킴으로써 되살아나지 못하게 짓밟으려 했다. 노무현과 그 주변을 괴롭혔다. 노무현은 자신의 실패가 자신이 믿던 가치의 실패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선택을 했다. 그것은 아마도 노무현 자신은 죽고, 자신의 가치는 살릴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노무현은 우리 곁을 떠났다. 11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왠지 그 사람은 아직도 멀지 않은 곳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고, 찾아가서 인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이제 우리 곁에는 없는 사람이다. 그의 부재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그가 지난 길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그가 살아있을 때 그가 도전했던 주류 권력과 경쟁자들은 그를 조롱하고 무시했다. 그가 온몸으로 살아낸 삶의 궤적을 깎아내리려 했다. 그가 가난했고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출발하여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는 노무현의 치열한 길과 그 가치를 그들은 부정했다. 그리고 노무현이 죽어서도 노무현의 가치가 살아나는 것이 두려워서 권력 기관은 그를 희화화하는 합성사진을 유포했고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했다. 그가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선전했다. ("팔아먹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동의하지 않으나 각 개인의 정치적 판단의 여지로 남겨둔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이건 아닌데..."


하지만 우리가 노무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완전해서가 아니었다. 노무현이 너무나 인간적인 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저항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서는 치열하게 노력했던, 우리가 만나고 싶고 보고 싶고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전기 속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부정할수록 사람들은 노무현을 떠올린다. 그래서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이려 하면 더 죽일 수 없는 어떤 가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노무현 없는 노무현의 시대


여론조사 업체인 갤럽은  2004년, 2014년, 2019년 3번에 걸쳐  <한국인이 좋아하는 40가지>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했다. 이 조사의 [사람 편]에는 스포츠 선수, 연예인, 역대 대통령, 존경하는 인물 등이 항목으로 있는데 그 결과의 변화가 무척 흥미롭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인들은 노무현을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으로, 그리고 역사 속에서도 손꼽히는 존경하는 인물로 생각하게 됐다. 산업화 시대 신화이자 상징으로는 박정희 대통령만이 올라가 있다. 그리고 그를 좋아한다는 결과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나는 이것이 신화와 상징이 대체되는 시대의 교차점을 지난 것으로 생각한다. 신화는 시대가 변해 그 가치가 다하면 유의미한 기억에서 소멸한다. 산업시대와 그 상징은 어느덧 역사의 저편으로 퇴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추도사에서 그의 죽음을 두고 "노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로 시작하여 "우리가 깨어있으면 노무현 대통령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로 마무리지었다. 그의 말처럼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게 되었다. 노무현을 폄하하고 깎아내리려 할수록, 사람들은 그가 남긴 것의 의미를 더 잘 깨닫게 됐다. 반면 (김대중과) 노무현이 싸웠던 가치와 세력에는 새시대에 맞는 신화가 될만한 이야기가, 그 상징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가치가 도래할 시대의 가치와 정신에 더 이상은 부합하지 않는 탓이다.

이승만과 전두환은 새로운 시대의 신화가 될 수 없다. 너무 낡았거나 너무 폭압적인 탓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노무현이 무오류의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과 뜻이 종교처럼 준엄하고 신성해서 노무현의 시대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너무나 '사람다운 사람'이었기에, 시대가 사람이 죽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기에, 보다 사람의 가치에 주목하도록 요구하고 있기에, '사람 사는 세상'인 '노무현의 시대'는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은 말년에 정치인으로서 행보를 회고하며 자신은 길을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길이 갈라온 물처럼 다시 합쳐져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랬던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히 제가 평하자면 그의 삶은 역사를 앞으로 전진시키는, 바다로 향하는 시대의 강물 같았다 하겠다.


노무현의 시대에 노무현은 이제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무엇이 우리 마음 한 켠 어딘가엔 남아있다. 노무현이 있던 노무현 이전의 시대에 나는 너무 어렸다. 그런데도 그때 내가 하지 않은 일, 꼭 했어야 하는 일이 떠오른다. 그가 뿌린 씨앗은 저마다에게 다른 의미일 것이다. 시민인 우리는 양심에 따라 각자 그것을 해냈으면 한다.



전기 속 범접할 수 없는 영웅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

떠오르지 않으려 해도 계속 떠오르는 노무현.

노무현이 남긴 숙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는 탓에.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없는 노무현의 시대가 오고 있다.



p.s

촛불정국에서 의경 기동대로 광장에 서있을 때 나는 느꼈다.


"보통 사람들이 힘이 아니라 양심을 따를 때, 두려움을 조금만 더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때, 더 나은 세상은 조금씩 우리 곁에 오기 시작한다. 비단 국가와 우리 사회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더 넓은 세상 역시 나아간다는 믿음이다. 우리 개인들이 끝내 해낼 수 있다 는 믿음이다. 그것이 광장과 거리가 내게 남긴 무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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