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도 견뎌야 할 것이 많았던, 2021년 회고
2021년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올해를 회고해보니 떠오르는 몇 년 전 기억이 하나 있다. 때는 2018년 5월 스물아홉, 의경 전역을 2개월 정도 앞둔 말년이었다. 불침번을 끝내고 들어가려는데 당직 경찰관 A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희철이 지금 몇 살이지?”
“스물아홉입니다”
“좋은 나이네. 아직 시간이 많고, 그래도 서른두 살에는 꼭 결정을 내려야 해”
말하자면 서른두 살 결정론. 무슨 말씀 인가 하니, 이 분은 서른둘에 경찰관이 되셨단다.
A 아저씨는 재주가 많은 분이었다. 영상을 잘 다루셨고(아이맥이 자기 책상 위에 있었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그런대로 잘하셨다. 경찰이 되기 전에는 사기업에서 세일즈를 했었고, 성과도 괜찮았다고 했다.
그런 A 아저씨가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계기가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제일 무서운 게 뭐나햐면, 하나는 너처럼 어린애들이 치고 올라올 때, 다른 하나는 나에게 시간이 많지 않음을 느낄 때야”
서른둘이 되었을 때, 이전과는 다른 체감이 시작되었고, 마침 결혼을 앞두고 ‘안정’과 ‘도전’ 중에 선택을 해야 했다.(고 느끼셨다고) 그가 택한 것은 ‘안정’, 그래서 그분은 경찰이 되었다. 경찰이 된 A아저씨는 그로부터 몇 년 동안 특진을 거듭하고, 가정도 잘 꾸려나가셨다. 실패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만 40대를 앞두고,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가보지 못한 길에 아쉬움은 남는다고 하셨다.
나는 서른둘이었어.
너도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올 거야.
그때 잘 선택했으면 좋겠다.
마흔을 앞둔 경찰 아저씨가 서른을 앞둔 내게 건넨 말이었다.
물론 서른둘 결정론이 대단한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거나 혹할만한 설득력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2021년, 서른둘 내게 정말 많은 변화가 있던 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회고 시작.
서른두 살 올해는 정말 단기간에 가장 많은 변화를 맞이해야 했던 시기였는데, 올 해의 나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냥 견뎠다." 나는 2020년 2월, '삶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관하여' 책을 썼다. 책에서 나는 '나', '관계',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려움들을 구분하고, 어려움을 직면하고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고 극복할 것을 강조했다. 직시하자면 '일단 견뎌야' 한다.
그렇게 썼던 나였지만, 올해 마주했던 어려움들은 퍽 쉬운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이제 나에게 '가능성의 탐색과 납득의 시간'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정이 두려워도 이제 나는 정말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때였다. 지난 10년의 방황 동안 나는 모아둔 돈이 없었다. 2번의 창업은 세상을 바꾸기는 고사하고 나를 구해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창업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2월 2번째 창업에 참여한 회사에서 퇴사하며, 실업급여를 신청했다. 약 5~6개월 정도는 가능성을 탐색할 시간이 있으리라 보았다. 먼저 프리랜서로서 가능성을 보고 싶었다. 기업과 브랜드 정보를 다룬 지식 유튜브를 시작했다. 스크립트부터 더빙까지 모두 맡아서 했고, 영상 편집은 PM으로 하되, 외주 도움을 받았다.
상반기 3개월간 7개 정도의 영상을 만들었다. (그중 한 개가 EBS로부터 사용 요청을 받았는데, 형의 이메일이라 보지는 못했다. 아쉬움이 남는다.) 지식 유튜브를 해보고 느낀 것은 영상 하나에 꽤나 큰 품이 들어가고, 1주 1 영상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 자료 조사부터 더빙, 편집 외주까지 하려니 당장 돈 들어갈 데가 많은 내가 오래 할 일은 아니었다.
결국 이번에는 창업 참여가 아닌 온전히 직원으로 취업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서른두 살 취업은 월 300 이상은 버는 직장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때문이었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마음을 지키기 어렵다. 그리하여 약간의 준비를 거쳐 나는 올 8월 얼마 전 시리즈 C를 받은 피플펀드에 콘텐츠 에디터로 취업했다.
피플펀드의 콘텐츠 에디터로서는 첫 채용이었다. 그만큼 나 스스로도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있었고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성실함과 좋은 태도에서 그보다 더 최선을 다할 자신은 솔직히 지금도 없다. 피플펀드 재직 중 새로운 포맷의 글들을 쓸 수 있어서 즐거움이 있었다. 배울 점이 많은 좋은 인재들을 많이 만났다.
하지만, 콘텐츠 에디터로 일하며 느낀 것은 나는 '쓰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핀테크의 글'은 규제와 고객을 감안하여 지극히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써야만 한다. 나는 그보다는 직접 시장에서 고객을 만나는 적극적인 플레이어이고 싶었다.
입사 2개월 차에 회사와 상호 협의하에 퇴사를 준비했다. 사업개발로의 직무 전환을 준비했다.
피플펀드는 정말 일을 잘하는 회사였다. 흔히 스타트업이 체계가 없다고들 하지만 사실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최고로 좋은 인재들을 모아놓고 실현해야 할 강력한 목표가 있으면 어떻게든 그것을 해내게 된다. 내가 이들에게 배운 것은 '선택과 집중'을 넘어 '배제와 집중'이었다. 모든 것을 하겠다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가깝다. 때문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드러커가 말하듯, 무엇을 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창업을 하며, 이것저것 다해본 사람에 가깝다. '뾰족한 어떤 특수한 능력'이 있다기보다는 방황하고 부딪히면서 넓어진 제너럴리스트였다. 이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삶에 태도에서도 묻어났다. "이것도 저것도 다 좋은 거 아니야?" 일단 다 해보고 걔중에 가장 잘되는 거 해보자는 느낌이었는데, 그렇기에 삶은, 특히 청춘은 끔찍이도 짧다. 경찰관 A 아저씨의 '서른둘 결정론'이 이제는 정말 체감이 됐다.
나는 진득하게 한 방향에서 깊이를 갖지 못했다. 그탓에 돈도 모으진 못했던 것 같다. 선택을 넘어 '배제'와 집중하기로 했다. 피플펀드 입사 후 3개월 만에 시작한 두 번째 취준에서는 철저하게 창업을 해본 나의 강점에만 집중했다. 다시 내 가치에 대해서 냉정하게 평가받는 시간을 마주했다.
결과적으로는 사업개발로 직무 전환하길 잘했고,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선택을 한 것보다 훨씬 나았다. 지원한 곳은 모두 서류 합격을 하거나 커피챗을 제안받았다. 최종적으로 3개 회사를 합격했다. 고심 끝에 2022년 내가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곳을 선택했다.
*이 이야기는 별도의 커리어 관련 글로 다루려고 한다.
운을 통제할 수는 없다. 다만 대응할 수 있다. 2020년 12월 31일 밤, 운전 중 교통사고가 났다. 상대 운전자는 소위 말하는 '나이롱'이었다. 보험사와의 합의를 거부하고, 시간을 끌며 겁박하고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취하려는 이였다. 연초에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정말 컸다. 나와 상대측 보험사 직원들 모두 두손두발을 다 들 정도였다. 결국엔 그가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과욕에는 대가가 있다.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상황을, 또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나쁜 사람을 혹은 귀인을 만날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불확실함을 마주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적어도 나만큼은 일관된 원칙대로 사는 것이다. 부당한 요구에는 응하지 말고, 사람을 대할 때는 친절함을, 일에서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 기억과 경험이 순간의 불운을 이겨내게 하고, 좋은 운을 만났을 때 그 운을 극대화시킨다. 왜냐하면 원칙을 지키고 최선을 다하며, 타인에게 사람에게 일관되게 친절한 이는 세상에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가치는 높다.
운이 없음을 탓하지 않는다. 다시 고군분투해볼 따름.
본래 아침에 잘 못 일어났는데, 확실히 오피스 생활을 하니 그게 좀 된다. 피플펀드에서 만난 동료 덕에 한 달 반 정도 출근 전 2시간에 일어나서 러닝을 하고 짧게나마 공부하는 시간을 보냈다. 체지방률도 10~12%로 떨어졌고, (매우 모자라지만..) 여자친구와 바디 프로필도 찍었다.
다만 11월 퇴사 후, 12월에 면접을 매우 많이 보면서 지켜온 좋은 루틴(특히 학습)들은 많이 무너졌다. 다가올 내년에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삶의 많은 것들은 잘할 수 있다. 혼자서도 제대로 열심히 하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적이 남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 몸이 좋아진다. 하지만 관계는 그렇지 않다. 사랑은 특히나 그럴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관계'다. 관계는 다른 자아의 세계가 만나는 과정이며, 그 결과이다. 그런 이유로 사랑은 서로를 마주 봐야만 한다. <나 혼자 열심히>는 최선이 아닐 수 있다. 사랑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개념과 명사를 아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무수히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를 아는 것이고 상대와 함께할 '나'를 아는 것이다. 함께 서로를 마주하며 존중하며 맞춰가는 과정과 결과에 사랑의 앎은 있을 것이다. 깊어가는 사랑은 그 책임을, 어려움을 요구한다.
그것을 만난 한 해였고, 이겨내려 부단히 노력했던 한 해였다.
서른두 살 나는 도전했고 고전했고, 많이 아팠고, 많이 배웠고 또 작게나마 성취했다. 내년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고, 참 고단했던 올해의 오늘 마지막 날을 지나고 있다. 올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창업을 그만둔 것과 프리랜서 생활과 2번의 취준과 체험으로 잘 알게 됐다. 사랑을 비롯한 무수한 관계들를 마주하며 나의 내면이 어떤 사람인지도 보다 더 잘 알게 됐다. 나를 더 잘 알게 된 덕인지 잘 견딘 덕인지 서른둘 마지막에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문득 레전드 복서 홍수환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꺼하는 선수가 제일 상대하기 어렵다”
고집불통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든 결국 자기 플레이를 하는 녀석이 짱이라는 말이다.
올해의 레슨이었다.
서른둘 나는 선택했고, 이제 달리면 된다.
잘하던 거 계속 잘하고, '배제와 집중'하며 서른셋 내년에 잘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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