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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Jun 14. 2023

복약안내서를 읽는 밤의 취미생활

취미라고 쓰고 명상이라고 읽는다

     요즘 다시 뜨개질을 시작했다.


     원래 손으로 사부작사부작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만 특히 뜨개질은 주기적으로 꽂히는 취미 중 하나였다. 연애할 때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기도 했고 코바늘로 아이의 모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한의대에 가려고 늦은 수능을 치러놓고 결과를 기다리는 피말리는 시간에도 집에 혼자 쳐박혀 하루종일 뜨개질만 해댔다. 항상 옷장 깊숙한 곳에는 뜨다 남은 털실이 굴러다녔다. 


지난 봄에 엄청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어느 새벽, 뭘 해도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문득 벽장 속에 묵혀두었던 털실과 바늘을 끄집어낸 것이 시작이었다. 유튜브를 선생님 삼아 겨울 버킷햇을 하나 뜨고 나니 점점 재미가 붙어 요즘은 꽤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뜨개질을 했어도 비싼 실 한 번 산 적이 없었는데 요즘 나는 한 볼에 만원이 넘는 북유럽산 수입실도 척 사본다. 오백원짜리 싸구려 줄바늘 몇 개에 앞뒤에 다른 호수가 달린 금속 코바늘 하나가 장비의 전부였던 내가 일본산 조립식 대바늘을 야금야금 모으고 있다. 


아름다운 색감에 좋은 퀄리티의 실은 모아두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만져보면 그렇게 보드랍고 포근해서 '반려실'이라는 말이 웃기면서도 공감된다. 질 좋은 바늘로 뜨개질을 하면 피로가 덜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예쁜 실, 좋은 바늘을 사면서 행복했다. 가난한 이십대에는 못샀던 걸 살 수 있는 돈 버는 나 너무 좋아, 사십대 만세!




     취미생활은 한가로운 여가시간에 즐겨야 할 것 같지만 자영업자 워킹맘에게 그런 사치가 있을 리가. 일할 때는 정신이 없고 퇴근해서 집에 가면 엄마가 놀아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초롱초롱한 두 눈이 기다리고 있다. 일과를 정리하고 아이를 재우고 나서 모두 잠든 후에야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이다.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같이 잠들어 버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 기를 쓰고 일어나 작업 중인 파우치를 들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간다. 겨우 확보한 새벽의 두어 시간, 조용히 손을 움직이고 머리를 비운다. 한 코 한 코 옮겨가며 묵묵히 나아가는 과정은 거의 수행 내지 명상에 가깝다.


언젠가 뜨개질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엄마가 말했다. 

 "니 임신했을 때 엄마가 그렇게 뜨개질을 많이 했다 아이가. 그래서 니가 손재주가 좋은 갑다." 

 "오, 진짜! 나 완전 모태손재주!" 

그때는 그냥 신기하다고 웃어 넘겼는데 요즘들어 가끔 그 시절의 엄마를 생각한다. 


겨우 스물대여섯 남짓이었던 엄마, 이미 딸 셋에 다음 아이까지 임신하고 있었던 엄마, 심지어 '넷째도 딸이면 어쩌지' 하는 불안마저 엄습했을 엄마. 전쟁같은 육아 중에도 졸음은 임산부를 끝없이 덮쳤을 것이다. 익숙한 가난에 무엇 하나 여유롭지 않았던 그 시절, 엄마에게 뜨개질은 어떤 위로였을까. 




     일보다 전투적으로 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취미생활이다.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차고 넘치기 때문에 쓸데없는 일일수록 '굳이'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왜 피곤한데 자지 않고 새벽에 나와서 안해도 되는 일을 하고 앉았는지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그게 나의 본업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안심시켜야 한다. 일만 하다 잠들면 죽을 거 같아요. 혼자 있는 시간이 잠깐이라도 필요해. 지금 이거라도 해야 멘탈 붙잡고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니까?!?


이거라도 하니까 버틴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평소 스트레스를 받아도 아래로 쳐지거나 땅 파고 들어갈 지언정 화산처럼 분출되는 성향이 아닌데도, 그 날은 빵 하고 터질 것 같은 날이었다. 뜨개질이 아니었다면 머릿속에서 부풀었던 그 불길은 어디로든 분출되었을 것이다. 


화가 올라올 때는 거대한 산불처럼 보이던 일도 잠깐 숨 좀 쉬고 돌아보면 후레쉬 불빛만도 못할 때가 많았다. 근데 그 잠깐 숨쉬는 게 어려운 거였다. 데스매치 끝에 상처뿐인 승리를 얻는 것보다 둥글둥글 다치지 않고 넘어가는 게 현명하다는 걸 아는데도 날카로울 때는 '다덤벼' 모드가 자동으로 설정되곤 했다. 


그래도 뜨개질을 시작하고는 숨 좀 쉬는 것 같다. 힘들었던 날도 닥치고 혼자 작업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안난다. 도안에 맞게 콧수와 단수를 세기도 바쁜 데다 왜 코가 하나 줄었지(두둥!) 고민하다 보면 저절로 머릿속이 텅 비워진다. 보통은 무념무상 손을 놀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중요한 생각이 정리될 때도 많았다. 




     친구를 만날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가기도 어려운 늦은 밤, 어디 공간을 넓게 쓸 수도 없는 집 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았던 조각난 시간에 나는 힐링하면서 예쁜 가디건도 뜨고 아이에게 줄 줄무늬 스웨터도 만든다. 세상사람들아 마 이게 완벽한 취미다!


쓸데없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나 하고 있다는 게 사람을 참 여유롭게 만든다. 나도 좋아하는 거 하나 하고 있으니까 별거 아닌 일은 걍 넘어가지 뭐. 그래도 가끔 화가 나면 생각한다. 나 열받게 하지마. 덴마크에서 캐시미어 실 직구하는 수가 있어. 일본 장인이 만든 코바늘 세트로 사는 수가 있어!!


... 그 정도면 웬만한 일은 대충 풀릴 거 같다는 뜻이다. 


이 쓸모없는 일의 쓸모를 누가 폄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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