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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Nov 17. 2023

복약안내서를 쓰는 밤의 자존감

나라는 존재에 익숙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특히 이십 대 초반의 몇 년은 거의 기억에 없다. 확실한 건 스무 살에 뒤늦은 사춘기가 왔고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학과나 동아리에 어울리는 대신 학교 밖에서 겉돌았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시기였다. 수시 전형으로 서울대에 합격했던 십 대의 끝자락이 내 자아가 가장 비대했던 때였는데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인생 최대의 쭈구리 시절로 접어든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의 기억은 오히려 생생하다. 서울역 역사 안 백반집에서 먹었던 밍밍한 김치맛, 역을 벗어나자마자 시야를 압도했던 갈색의 육중한 빌딩, 지나치게 많은 자동차의 시끄러운 경적소리, 출렁이는 사람들, 점멸하는 불빛, 도시의 냄새. 이방인이 되었다는 자각이 오감을 총동원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서울에는 서울사람이 잔뜩 있었다.' 지금에야 서울에 있는 사람이 다 서울사람도 아니고 서울사람이라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을 알지만 그때는 어쩐지 그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울대에도 서울대생이 가득했다.' 여기 와 보니 성적으로 완성되었던 내 자존감은 실은 별 것도 아니었다. 대학 가면 없어진다던 여드름은 없어지지 않았고 대학 가면 생긴다던 남자친구도 생기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훨씬 많았지만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는 날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때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고 나쁘기 전에 일단 잘 몰랐다. 공부만 잘하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서 진짜 공부만 했던 십 대 시절을 보내고 나니 객관식 밖에 있는 모든 결정이 어려웠다. 스무 살이 넘어 자유 속에 내던져지고 나서야 내 취향이 뭔지, 장점이 뭔지, 나한테 어울리는 게 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한 결정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학의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 일 년간 휴학을 했다. 했던 일이라곤 딱 두 가지였다. 운전면허 따기와 유럽 배낭여행. 휴학하자마자 딴 운전면허는 아직까지도 별 쓸모가 없는데 복학 직전에 떠난 배낭여행은 그전과 후를 가를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사건이 되었다. 


     오래 준비한 여행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그렇게 크게 질러본 게 처음이었다. 혼자 계획을 세우고 동선을 정해 비행기 티켓과 유레일패스를 사고 숙소를 예약했다. 저렴한 것 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것을 고르고 또 골라 예약하는 바람에 애당초 모든 지출은 환불이 불가했는데 닥치고 보니 그게 내 동력의 팔 할이었다. 떠날 날이 다가오니 슬며시 겁도 나고 왜 혼자 간다고 설쳤나 후회가 밀려왔지만 돌이킬 수가 없어서 그냥 떠났다. 


     내가 오롯이 나와 함께 한 첫 여행이었다. 부족한 예산과 초심자의 시행착오가 뒤엉켜 결코 즐겁기만 한 여행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두 달간 적어도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계획을 열심히 세우면서 즐거워 하지만 막상 별로 지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길을 잃거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해도 별로 스트레스받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외로움을 타면서도 혼자인 걸 잘 견딘다는 것도, 대체로 소심한데 의외의 부분에서 대담하다는 것도 알았다. 먹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 좋아하는 그림 앞에 한없이 앉아있는 것도 여행이라 생각하는 사람, 결과가 늘 좋을 수는 없었지만 나빠봤자 새로운 추억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아주 조금 친해져 있었다.


     작은 허들을 넘자 스스로 뭔가 해낼 수 있는 근육이 조금은 붙은 느낌이었다. 그 여행 이후 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졸업한 뒤 취직해 돈을 벌기 시작했고 연애도 했다. 좌절도 했고 뻘짓도 했으며 여전히 쭈구리인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게 된 것이 이십 대의 마지막 해였다. 인생을 뒤바꿀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나서야 긴긴 사춘기가 끝이 났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되면서 조금씩 스스로를 긍정하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 없는 날이 훨씬 많았다. 지금의 결과는 좋지만 사실 내가 되게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게 불안했고 어쩌다 우연히 얻어진 성공 뒤에 숨겨진 찌질함을 누군가 눈치챌까 전전긍긍했다. 너무 불안한 나머지 가끔 실패하면 오히려 안도감마저 느꼈다. 그래, 이게 내 원래 모습이야.


     어느 날 내 영혼의 쌍둥이와 같은 셋째 언니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언니가 그게 '가면증후군(임포스터증후군, Impostor syndrome)'이라고 알려주었다. 내 눈에는 뭐든 잘하고 못하는 게 없는 대단한 언니도 평생 똑같은 두려움에 시달렸고 전 세계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여자들이 대부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다고 했다. 내 성공은 운이고 내가 이룬 성취는 실은 내 실력이 아니며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 오랜 시간 깊숙이 자리 잡은 나의 내밀한 고민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여자들이 함께 해왔었다는 사실은 충격과 안도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높은 자존감은 타고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치열하게 파악한 스스로의 강점을 활용하면서 쌓아나가는 적립금 같은 거였다. 다만 이 적립금은 적립버튼을 찾아서 누르지 않으면 소멸되는 시스템이라서, 겸양은 집어치우고 내가 얻은 성취로부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꼬박꼬박 적립해야 한다. 가면 뒤 어둡고 습한 곳에 숨은 진짜 내 모습을 찾으려는 나쁜 버릇은 아직도 남아서 수시로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지만 그럴 때마다 기를 쓰고 소리쳐야 한다. 지금 그건 가면이 아니라 내 진짜 얼굴이라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스스로를 믿는 것이 자신감이라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언가를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요는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어떤 일의 성패가 아니라, 번듯한 직장이나 두둑한 연봉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내세울 장점과 숨겨야 할 단점을 많이 알아낼수록 상황은 유리하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잘 다듬어진 길이 어디인지, 그 와중에 험난한 바위더미는 어디쯤 쌓여있는지 알면 그 길을 걷는 것은 훨씬 쉬울 수밖에 없으니까. 


     서른이 되어도 마흔이 되어도 자잘한 실패를 거듭해 자아가 쪼그라드는 날은 수시로 있었다. 그럴 때마다 모아둔 적립금을 보험처럼 지불하곤 했다. 가끔 잔고가 바닥날 때는 다시 불안이 엄습하지만 일 년 내내 흐리기만 한 인생은 없다는 것은 이제는 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좋은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뒤늦게나마 내가 새로운 진로를 고민하고 선택해 지금의 자리에서 마흔을 맞이하게 된 것은 사실 온 우주가 도와준 결과물이었다. 또 다른 어딘가의 평행우주에서는 아직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또 다른 내가 여전히 기로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세계의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그건 이제 막 인생이 시작되려는 딸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정과 맞닿아 있다. 지금은 세상모르고 내가 만든 울타리 안에서 단순하게 살고 있는 여섯 살 아이. 또래보다 조금 느리게 크고 있는 나와 닮은 이 아이가 끝내 스스로를 믿고 세상을 긍정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내가 내 인생을 엎어치고 매치며 치러온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문제다. 나름의 해답을 찾는 데까지 아마도 내 평생의 시간만큼 더 걸리지 않을까. 


     지금은 다른 방법을 몰라 그저 사랑을 퍼부어줄 뿐이다.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귀찮아할 때까지 말해준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싶다. 나를 사랑하고 남도 존중하는 방법을 보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를 더 믿어야겠다. 당분간 자존감의 적립금은 더블로 쌓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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