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잘 늙어가는 사람들

잔잔한 수면 위의 윤슬처럼 삶에의 반짝임을 멈추지 않는 것

by 김민율

천천히 잘 늙어가는 사람들




늙음은 인간 현상의 일부이다. 늙음이 아름다우려면 사람은 사랑의 존재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홀로 고독하게 늙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쓸쓸하지만, 가까이 곁에 있는 다정한 노부부의 늙음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아득한 과거와 현재가 겹겹이 겹쳐져 경이로운 미래의 연인 같아 보일 때가 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불빛이겠지만, 아직 꺼지지 않은 빛의 늙은 연인들. 두 사람은 마치 시적인 것 너머의 어떤 마지막 아름다움을 향해 함께 걷고 있는 것만 같다.

그날은 저녁 산책 무렵이었다. 추석 명절을 지내고 이틀 만의 외출이었다. 집에만 있었더니 소화도 안 되고, 환절기라서 몸도 피곤해지는 것 같아 일단 나가서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선 것이었다. 걷고 나면 피가 잘 돌아 몸이 개운하고 활력이 생겼기 때문에 매일 조금이라도 걷는 일에 부지런해야 했다.

아파트 단지를 둘러싼 산책로가 있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저만치 앞에서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아내는 다리가 불편한지 걷는 게 좀 힘들어 보였다. 옆에서 남편이 손을 잡고 아내를 부축하듯이 걷고, 아내는 남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노부부의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앞질러 가면 다정한 노부부의 뒷모습을 볼 수 없으므로. 아름다운 인생의 장면을 오래 보고 싶었으므로. 이런 장면은 내가 몇 년 전부터 좋아하던 풍경이었다.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걷고 있는 노부부의 뒷모습은 다정하고 쓸쓸하고 따뜻하고 애틋했다. 저렇게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나는 참 좋았다.

늙음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내게 다가올 때는 손 잡고 걷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볼 때였다. 남편은 정수리 쪽 머리가 벗어져 몇 올 남지 않았으나, 내게 그러한 외적인 모습의 늙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은 노부부의 평온한 걸음걸이와 느린 속도와 서로를 향한 사랑과 인내, 배려와 책임과 의지다. 노부부의 등은 곧추서 있지 못하고 조금 굽은 듯이 둥글어져 있었다. 마치 노부부의 마지막 인생이 둥근 형태로 빚어지고 있는 것처럼.

한참을 걷다가 노부부는 산책로를 벗어나 아파트 입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샛길로 들어섰다. 집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노부부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홀로 걸었다. 오늘 내 몫의 걷기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지상에 우리의 몸을 묶어놓는 것은 사랑의 중력이다. 우주적인 그 힘으로 우리는 살고, 서로의 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힘이 없다면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지고, 끝없는 생에 대한 무의미로 인해 고통받을 것이다.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마지막까지 잃지 않아야 할 것은 사랑하는 능력이다. 모든 사람을, 모든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자신의 한계만큼, 자기 존재의 그릇만큼 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동물이므로. 다만 인간에게는 단 한 사람이라도 성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둥근 품이 있다.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절망적인 사람에게도 자기 자신을 품을 수 있는 희망적인 품이 있다. 생에 대한 마지막 사랑과 열정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품을 선사한다는 것. 서로를 품을 때 비로소 깊은 울림이 생긴다는 것. 그래서 아름답고 고유한 존재의 음악이 우리에게서 숨의 리듬과 함께 들린다는 것.

어느 날 문득, 아름다운 이국의 바람 부는 해변가에서 노부부가 손을 맞잡고 춤추는 풍경을 물끄러미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 적이 있다. 두 사람에게 음악은 바람소리이고 파도소리이며 햇빛이다. 두 사람의 몸은 바람과 파도와 햇빛의 흐름 위에 있다. 서로의 움직임 속에서 어떤 리듬이 생겨나고, 모래밭에 푹푹 빠지는 맨발이 그 리듬을 따라 경쾌하게, 혹은 느리게 움직인다. 마침내 남편은 아내의 흐름 속에 아내는 남편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며, 이번 생의 마지막 춤을 함께 춘다. 세상의 끝에서 한 점으로 수렴되는 사랑의 완성을 위해 스텝과 스텝, 몸짓과 몸짓의 조화를 맞추면서.

서로의 곁에 가까이 있는 존재들은 늙음 너머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간다. 백발의 누군가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먼저 거두고 홀연히 떠나겠지만. 그것은 어떤 불행도 비극도 아니다. 영원을 향해 함께 늙어감은 어마어마한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세상의 끝에서 어떤 존재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생의 결말에 닿은 것이 아니라 생의 절정에 닿은 것이다. 그의 늙음과 미래의 죽음이 의미 있는 것은 그만이 느낄 수 있었던 어떤 존재와 나눈 사랑의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한 때 샤갈이 창조한 유쾌하고 환상적이며 동화적인 사랑의 세계를 열망한 적이 있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한 화가였을 적에 그는 돈이 부족해 재생 캔버스나 홑이불, 심지어 자신의 속옷에다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자신만의 세계 창조에 열정적이었던 그의 그림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생일>이다. <생일>은 그의 약혼자이자 아내였던 벨라가 샤갈의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아침부터 꽃다발을 만들어 집으로 찾아왔던 날의 기쁨을 환상적으로 창조한 것이다.

그림 속 벨라와 샤갈은 공중에 붕 떠 있고, 벨라는 흰 카라가 달린 검은 원피스를 입고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다. 샤갈은 초록색 셔츠 차림으로 허공에 붕 떠서 벨라와 입맞춤을 하고 있다. 붉은 양탄자 위, 두 사람만의 사랑의 몸짓이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샤갈과 벨라는 평생을 함께 늙어가며 사랑하며 살다 그림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 속에서 영원한 젊은 부부이자 연인으로 등장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의 아름다움과 환상과 꿈을 남겨둔 채.

마침내 늙어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끝에서 사라질 때, 떠난 자리에 남겨놓고 가는 풍경은 어떤 풍경일까. 당신과 나는 생을 다한 후에 어떤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을 수 있을까. 누구든 영원한 풍경으로 남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잊힌, 잊힐 풍경의 운명에 발이 묶인 것이니까. 다만 사라진 존재를 기억하는 자가 있음으로 살아있는 풍경으로 잠시 존재할 수 있을 뿐. 잊히는 순간 누구든 풍경의 죽음을 맞이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것이다.

붉은 꼬리 말똥가리는 나보다 빨리 늙는다. 부화 후, 몇 주 지나면 어른 새만큼 커지고, 46일이면 둥지를 떠나 독립한다. 커진 날개를 퍼덕이며 금세 높이 날아오른다. 마침내 비행을 시작한 새들은 사냥을 하고 암컷 수컷이 만나 부부가 되어 둥지를 짓고 알을 낳는다. 포란의 계절을 지나 어느 늙은 때에 이르면 나보다 먼저 죽는다. 그게 좀 애석한 일이다. 새든, 사람이든 나보다 먼저 죽는 것을 보는 일은 서글프고 고독하다. 다만 당신과 내가 생기발랄한 젊음과 색과 빛을 잃어가고 있더라도 슬픔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자기의 몸을 환대하면서 천천히 잘 늙어갔으면, 잘 살아있으면 한다. 삶은 어떤 과정의 연속이니까. 그 과정이 아름답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늙음은 유한한 육체가 거쳐가야 하는 유의미한 과정의 일부이니까. 겉모습은 점점 색이 바래져 얼룩덜룩해지고 아름다움을 잃어가겠지만 진정으로 빛을 잃어가는 것은 아니다.

늙어감은 더 많은 빛을 반사해 거울 속에서 자신도 모르던 자신을, 어떤 깊이의 세계를 발견하게 한다. 아직 여기 살아있어 존재하는 한, 잔잔한 수면 위의 윤슬처럼 삶에의 반짝임을 멈추지 않는 것. 그렇게 잘 늙어가는 사람은 모든 세상의 빛을 끌어 모아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삶의 비밀들을 수면 위에 드러낼 것이다. 지상에서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됨일지라도.

찬란한 빛 속으로 다 자란 배지빠귀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다. 저 새도 늙어가겠지만, 늙음은 세상 끝으로의 추락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마지막 아름다운 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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