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여행

by 주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고려원’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닥터 지바고>를 아직까지 소장하고 있다. 결혼할 때 본가에서 챙겨 나온 수백 권의 책들 중에서, 몇 번의 이사 그리고 수차례에 걸친 대청소 난리통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대개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한 번씩 서가 내 위치를 바꿔주기도 할 만큼 애틋한 책이다. 그럼에도, 20여 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희미하게 만들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이 책의 줄거리는 솔직히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먼지를 털면서 혹시 책벌레가 있는지 누렇게 변색된 페이지를 촤르르 넘겨볼 때면 머릿속에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설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 한가운데를 무념무상하게 달리는 횡단열차의 모습만 떠오를 뿐이다.

그즈음부터였다. 끝도 없이 달리는 열차에 오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몇날며칠을 꼼짝 않고 오래오래 앉아 있고 싶었다. 바깥 풍경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았다(창가를 고집한 것은 통로 쪽에 앉아서 이런저런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테이블과 노트와 연필, 그리고 많은 책들만 있으면 되었다. 객실 내 적당한 소음과 열차가 규칙적으로 때때로 불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박자감이 나를 둘러싼 장막이 되어줄 터였다. 장막 속에서 나는 하얀 종이 위에 한 줄 한 줄 세워지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허용하지 않는 세계 속에 마음껏 빠져들 것이었다.

그즈음이었다. 6주간 유럽을 여행했다. 내 덩치만 한 배낭과 침낭을 매고 돌아다녔다. 여름이었고, 지칠 줄 몰랐고, 혼자였다. 그리고 유럽의 웬만한 도시들을 내키는 대로 갈 수 있는 레일패스가 있었다. 계획 없이 다녔더니 쓸 거리가 많았다. 공원이나 광장에서도 썼지만,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기차 위에서 많이 썼다. 뮌헨과 프라하를 잇는 야간열차에서는 소설 비슷한 것도 구상했던 것 같다. 버리지 못하는 미련함 때문에, 놀랍게도 그때 들고 다녔던 노트들이 아직도 박스 안에 넣어져 집 창고에 처박혀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고, 나 스스로도 다시는 들여다볼 용기가 없는 기록들이다. 3, 4년 정도 더 처박아두었다가 박스째로 내다 버릴 것이다.

아이들이 아직 많이 어리던 때, 무턱대고 부산행 열차에 올라타는 일탈을 꿈꾸기도 했다. 작은 가방에 노트와 연필만 챙겨서 서울역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부산역에서 출발해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화장실도 가지 않고 붙박이처럼 자리에 앉아 쓰고, 쓰고 또 쓸 요량이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그 일탈은 그만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이제는 글을 쓰기가 쉽지 않다. 머릿속에 끝없이 맴돌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는 문장들이 안타까워 꿈속에서도 마음이 다급했던 때가 있었다. 노트에, 책에, 나중에는 핸드폰에도, 무언가가 떠오를 때마다 단어들의 나열에 그칠지언정 적고 또 적었다. 그렇지만 충분히 절박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지켜내지 못했다. 수많은 문장들이 게으른 주인을 탓하며 영영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바보같이,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눈물이 난다. 오래전 나의 조각들을 그러모으려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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