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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Oct 26. 2024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정현주 변호사 



책장에 서서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한다. 눈을 떠 보니 벌써 한낮의 해는 넘어간지 오래이고 집에는 아무도 없다. 창가로 비치는 해의 그림자를 보니 보니 아마 오후 2시쯤이 넘은 것 같다. 책장에 서 있던 나는 식탁에 앉아 어젯밤에 먹다 남은 치아바타 샌드위치 반쪽을 마저 먹는다. 양상추와 담백한 수제 치즈, 구운 베이컨이 들어가 있는 담백한 샌드위치이다. 



무엇인가를 먹는 행위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원치 않는 일이기도 하다. 언젠가 나는 '태어나짐'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정말로 그렇다. 사람은 자신의 탄생을 선택할 수 없다. 눈을 떠보니 '태어나짐'을 당한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적어도 죽는 순간 정도는 내 의지로 하고 싶어. '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 이를테면 죽음이 갑자기 찾아오더라도 나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고 싶은 거야. ' 



물론 죽음 또한 내가 원하는 때로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생각한다. 샌드위치를 절반쯤 먹고 있자 갑자기 목이 막힌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물을 끓이고 인스턴트커피를 만든다. 한낮의 오후, 나는 시간을 잊은 채 식어버린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읽어 볼 책들을 생각한다. 이 시간에도 물론 나의 핸드폰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울리며 끊임없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주지시킨다. 하지만 어떤 날은 전원을 빼듯,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진동 상태가 되어 나를 그림자로 밀어 넣어야 한다. 그래야 겨우 숨을 쉴 수 있다. 



몇 주 전, 나는 5권의 책을 선물받았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가 회사 복지포인트로 일 년에 50권 정도의 책을 구매해야 하는데 그만큼 살 책이 없다면서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주문해 주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골랐다. 물론 읽은 책이다. 그것도 몇 번이나. 나는 늘 읽는 책만 읽는다. 늘 가던 식당을 가고 새로운 것들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와 나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한다. 마치 영속적인 탈피를 계속하다 죽어버리는 한 여름의 풀벌레처럼. 



깊이에의 강요. 얼마나 모순적인 말인가, 깊이는 강요로 될 수 없다. 깊이는 '태어나짐'과 마찬가지로 어느 날 생겨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흉내로도 선택으로도 어렵다. 어떤 이들은 평생에 걸쳐 깊이를 가지기 어렵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날부터 깊이가 생겨버린다. 때로 그 깊이는 끊임없이 깊어, 혼돈의 어둠 속으로 빠져버리기도 한다. 혼돈의 어둠으로 빠져버린 자는 스스로 그 깊이에서 빠져나오기가 정말로 힘들다. 



'영속적인 탈피' 나는 생각한다. 오후가 훨씬 지났지만 나는 이제 눈을 떴고 아직 잠옷을 입은 상태로 앉아 있다. 이대로 어둠이 깊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있을까? 문득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고요와 허기짐을 채운 약간의 포만감이 마음에 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책장에 가서 책을 보다가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멀리 창밖으로 비치는 풍경을 바라본다. 아주 먼 공간을 바라보는 것처럼. 몽골의 광활한 초원, 아무것도 없었던 드넓은 평야에서 한 지점을 쳐다봤었던 것처럼. 



까마귀들이 울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이 울 때면 나는 어딘가 잘 모르는 풀숲에 앉아있는 느낌이 든다. 나는 하염없이 한자리에 앉아 귀찮은 마음에 슬며시 들어오는 문을 닫아버린다. 어떤 이와 무엇을, 다시 말해 어떤 감정이나 신념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 이 차분한 공간에서 나는 안온한 마음으로 내 마음의 빛을 느끼면서 고요하게 머무르고 있다. 혹시 나는 스스로 위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보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오히려 완전한 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황폐한 사막이 아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있는 안온한 회색의 공간이다. 



'영속적인 탈피' 그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삶은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 기차에 앉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흘려보내고 있는 작업과도 비슷하다. 그것들은 익숙한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지금 이 순간조차 내가 가진 것들이 끊임없이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탈피'와 같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가 전혀 없어 보이는 것들조차 사실은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착실하게 변화되고 있다. '태어나짐'과 달리 그 변화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대로 있어도 삶은 변한다. 나는 그 변화를 선택한다. 선택된 삶을 살지 않는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2006년 티벳 라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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