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길었던 그 어느 여름밤의 일이다. 불덩이 같은 열이 내리고 나서 너는 늦은 시간까지 풀벌레들이 울고 있는 풀숲을 찾아 들어갔다. 주위는 캄캄하게 어느덧 어둠이 내렸지만 너는 여전히 달뜬 잔열이 몸에 남아 있었다. 그 열은 너를 웃게 하고 또 울게 만들었다. 미열은 마치 다른 세계에 담긴 듯 새로운 느낌이 들게 했다. 너는 색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난 듯이, 때때로 웃고 때때로 울면서 계속 풀숲을 거닐었다.
우리는 큰 공터에서 오래간만에 만났다. 너의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은 뒤로 비치는 햇살같이 내 마음으로 파고 들어왔다. 너의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 섬세한 도자기의 표면같이 매끈한 얼굴, 날렵한 입술은 내 마음에 심어 놓았던 잔잔하고 아름다운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수평선을 이루고 있는 늘 푸른 바다 위의 낮은 조각배를 바라보며 그림같이 앉아 있었다. 너는 그곳에서도 두 손을 포개고 내 옆에 앉아 있다. 어디선가 낮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 요즘은 마음이 어지러운지 현상에 집중을 하기가 어려워. 옛날처럼 마음과 마음을 대면하는 것이 점차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
' 마음과 마음의 대면. '
너는 나의 말에 감탄하듯이 대답한다. 생명체가 없는 이곳은, 서로에게 어떠한 언어적인 제한도 없이 서로에게 필요한 말들을 나누고 또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믿게 된다. 우주 속의 한 지점이 된 듯한 평화로운 마음.
' 이를테면 ㅡ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쉼일지도 모르겠어. 늘 그러하지만 그렇더라도 마음을 제때에 비워두는 것이 필요하겠지. 꽤 오랫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어. 상당한 방황이었던 것 같아. 내가 헤매었던 덕분에 많은 것들이 상실(喪失) 되어 버렸지만. '
' 어떤 상실을 말하는 거야? '
너는 묻는다. 늘 그렇듯이 반짝이는 눈으로 고요하게. 그림의 마지막 지점을 그리는 날렵한 붓의 끝처럼.
' 이미 지나버린 것들에 대한 상실이지. 과거에 대한 상실. 영속적인 죽음.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는 알 수 없어. 내가 앞으로 어떤 세계를 살게 될지는 명확하게 속단하기 어려워. 그리고 늘 그래왔어. 나는 때때로 세계의 문을 닫았어. 세계의 문을 닫으면 반드시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가게 되어 있어. 어떤 경우에는 자발적이기도 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 어떤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기를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반드시 그때에 벌어지곤 했어.
일단 세계가 닫히고 나면 나는 눈을 감았지. 꽤 오랫동안을 사방이 막혀버린 우물 속에 혼자 남겨진 채로 영면하는 시간을 보냈어.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었어. 마치 우주 속에 혼자 떨어져 나간듯한 기분마저 들었지.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나 스스로 훼손되지 않기 위해 거대한 벽을 쌓고 그 안에 본체를 분리하기로 한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상실'이란 꼭 나쁜 것은 아니었어. 나는 그 과정을 통해 나의 본질을 조금 알게 되었으니까. '
우리는 마음의 대화를 하고 있다. 이런 일이 삶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나와 너가 무척 운이 좋다고도 생각한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들은 큰 의미가 없이 지나간다. 하지만 아주 가끔, 의미 있는 때가 일어나고 사람은 때때로 그렇게 가장 소중한(했던) 순간들을 기억 속에 봉인한 채 어려운 때마다 난로처럼 꺼내어 그 따스함에 기댄다. 그리고 힘을 내어 살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 어차피 생의 많은 것들과 이별하게 되지. 굳이 노력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
나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너는 말한다.
' 그리고 대부분의 인연의 끝은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그때를 알 수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우리의 삶이 어쩌면 큰 운명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때때로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어.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과연 나 스스로 무엇인가에 노력을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
너는 두 다리를 모아 팔로 둥글게 끌어 앉으면서 머리를 무릎 위로 기대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너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햇볕에 반짝거리면서 흩어진다.
' 그리고 우리도, 또 다른 인연들과 마찬가지로 잠깐 멈춰 있는 찰나에 불과할지도 몰라. 만남의 만남을 이어붙이는 조각들처럼. '
나는 너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 그래, 너의 말대로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주 잠깐이라 해도 삶의 그 순간을 각별하게 만드는 때라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무척 소중한 순간이지. 우리는 늘 깨어 있을 수 없고, 또 깨어 있다고 해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물론 너와 이 정경 속에서 그림처럼 남아 언제까지나 함께 머물고 싶지만. '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언제까지나 ' 상실' 속에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늘 그렇듯이 익숙한 것들에 작별을 고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닻을 올린 이상, 나는 이미 구도자(求道者)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너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야? '
너는 나의 마음을 읽은 듯이 이렇게 물었다. 너는 지금 너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다.
' 사랑이란 다른 많은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ㅡ 소중한 나의 마음 중에 하나야. 하지만 나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면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아. 물론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랑을 받고 싶지도 않아. '
' 어떤 것이 제대로 된 사랑일까? '
' 나는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것은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거든. 본질적으로는 상대를 위하고 또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 기꺼이 마음을 내어 준다. '
사랑이란 마음의 강렬한 감정은 언제든 내가 사랑한다고 믿는 대상에 대하여 해를 가할 수 있다.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매우 이기적이며, 자신의 이기심의 끝을 확인하는 마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 '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면 사랑이란 ' 상대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강렬한 사랑의 갈구 ' 이기도 하다. 너만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달라는 강한 욕망의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 모든 폭력적인 욕망들이 우리가 믿는 보통의 사랑에 숨겨져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마음들을 나의 잣대에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나는 너를 해하고 싶지 않으며 너와 본질적으로 함께 있고 싶다.
' 하지만 너의 실체는, 어디에 남게 되는 거야? '
너는 물었지만 나는 이 질문에 마땅히 말할 수 있는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하염없이 너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의 모습이 더 옅게 흩어지기 전까지. 이윽고 하늘이 조금씩 사라지고 땅이 조금씩 흐려졌다. 너의 모습도 나의 모습도 흐려지다가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나는 그림과도 같은 정경 속에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너에게 안녕을 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