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어릴 때 귀하게 컸다고 하자 엄마가 한 말....
<사람은 누구나 귀하다>
문득 음식 앞에서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왜 웃어?"
"아빠 생각이 나서...."
음식을 먹다말고 갑자기 생각난 아빠 얼굴, 그리고 그와 함께 어디선가 엄마의 목소리가 음성지원 되듯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귀하게 컸으면 얼마나 귀하게 컸다고! 머슴이 엎고 다녔냐? 머슴이 학교까지 10리, 20리 걸어서 엎고 다닌 정도는 되야 귀하게 큰 거지. 사람들 다 귀하게 크지.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대충 키우냐. 다 귀하게 키우지. 먹고 싶으면 가져다 먹어!"
"이거 누가 먹던 거에요? 그럼 안 먹어요."
학교가 끝나고 돌아온 조카가 간식을 보며 지나가면서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엄마는 예민하게 군다며 투덜거렸고, 나는 그 모습에 어릴 적 나를 떠올렸다. 결벽증도 아니면서 내가 유일하게 예민하게 굴었던 게, 누가 먹은 건 안 먹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내 음식에 입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엄마 뿐이었다. 어린 나는 엄마 빼고 누가 내 음식을 누가 먹으면 화를 내거나 그 음식을 다시 먹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남이 먹던 거 같이 먹지 말라'는 위생교육 같은 걸 학교에서 받은 게 내 생각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어서 였을 것이다.
"너희 아빠가 꼭 그러더라. 예전부터 자기는 사과즙 같은 거 그냥 가위로 잘라서 통째로 먹으라고 하면 자기는 귀하게 자라서 그렇게 못 먹는다고, 컵에 따라 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머슴이 엎고 다녔냐? 머슴이 학교까지 십 리, 이 십리 걸어서 엎고 다닌 정도는 되야 귀하게 큰 거지. 사람들 다 귀하게 크지.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대충 키우냐. 다 귀하게 키우지. 컵에 먹고 싶으면 직접가져다 먹어!"
"와~ 대박"
엄마의 뼈있는 속시원한 외침에 나는 연신 물개박수를 쳐댔다. 엄마는 내 반응에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귀하게 자라는 것은 어떻게 자란 걸까?'
엄마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할 때면 자신는 어릴 때 엄청 예쁨을 받고 자랐다고 하셨다. 7남매의 둘째로 태어나 위로 언니 하나, 아래로는 여동생3명, 남동생2명이 있었는데 7남매 중에서 할아버지에게 가장 예쁨을 받았노라고. 할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아서 특히 예뻐하셨다고...
그 중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할아버지 무릎 방석'이었다.
"나는 밥을 먹을 때 바닥에서 먹어본 적이 없어. 우리 아부지 무릎에서만 먹었어. 다른 이모들은 검정 고무신 신고 다닐 때,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장에 가서 빨간 구두를 사다줘서 나만 구두를 신고 다녔어."
"엄마, 그게 엄마가 딸에게 하는 자랑이야? 그렇게 치면 엄마만 빨간구두 사주고 이모들은 고무신 신기면, 이모들한테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 곱게 컸으면 우리도 좀 곱게 키워주지."
나의 볼멘 소리에 엄마는 과거의 회상에서 금세 빠져나와 또 큰 소리 치셨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키웠다. 그만큼 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 해. 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엄마의 이 말 한 마디에 'Game over'된다.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하고, 우리가 보기에도 노력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예순 네 살의 엄마는 아직도 짱짱하다. 예전의 소녀같은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예전의 장난끼도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당당함만은 여전하시다.
"엄마는 참 좋겠다. 자신감이 넘쳐서."
"우리 아버지가 그랬는데... 돌아가시 전까지도 큰소리 빵빵치셨지."
"그럼 엄마도 죽기 전까지는 큰소리 빵빵치겠네? 아이고 무셔라~ 지금도 이렇게 빵빵한데 나중에 더 빵빵해진다고?"
"그 성질머리가 어디 안가나봐. 아버지가 나한테 참 잘해줬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네. 나도 내 새끼 키우느라 바빠서 챙겨주지도 못하고..."
엄마는 외할어버지 얘기에 잔뜩 감성에 젖었다. 엄마는 외할어버지의 사랑받던 딸이었지만 자식 키우느라 할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의 반도 못 갚았다고 하셨다. 우리 집 딸바보인 남편은 나중에 딸이 사춘기가 되서 "아빠랑 대화도 안하고 싫다"라고 말하는 게 제일 무섭다고 지금부터 걱정이다. 가끔 남편의 모습에서 엄마의 기억 속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남편이 우리 딸들을 어여삐 여기듯 엄마도 외할아버지의 어여쁜 딸이었을 것이다.
'우리 아빠' 이야기로 시작해서 '엄마의 아빠' 이야기로 끝나버린 모녀의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