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은 한가한 시간에 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가야 한다는 것!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은 지 4일째가 되는 날, 가슴에 있던 커다란 염증은 싹 사라졌다. 정말 염증이었다. 감사할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코로나는 더욱 극성이었고, 병원 가는 일이 조심스러웠고, 외출이 줄었다. 아이들은 집에서 시간이 많았고, 육아는 끝이 없었다. 아이들이 조금 컸다고 육체적인 신경은 덜 써도 됐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더 심해졌다.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잔잔한 파도 같던 마음은 어느 순간 폭풍처럼 흔들거렸고, 불같이 화를 내는 일도 있었다. 어느 순간엔 마음이 조절이 되지 않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바뀌지 않는 상황 속에서 조금은 무기력해졌던 것 같았다.
유방외과 진료 후 4개월 정도 지나 건강검진을 했다. 여전히 그 수상한 혹은 그대로 있었다. 미세석회도 있었지만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확인했던 터라 크게 겁나거나 무섭진 않았던 것 같았다. 4개월 동안 크지도 않고 모양도 그대로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된 정기검진 날이 다가왔다. 남편은 일이 많아져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크고 작은 이슈들로 바쁜 나날들이었다. 코로나는 극심해졌으며, 아이들이 돌아가며 조금씩 잔병치레를 하는 바람에 병원 갈 여유가 없었다. 그냥 가까운 병원에 다닐 걸 괜히 멀리 있는 병원에 다녔다는 후회가 들었다. 운전이 서툰 내가 갈 수 있는 지역이 아니라 택시를 타거나 남편과 함께 가야 하는 거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다 변명이고 후회였다. 그냥 택시를 타고 갔어야 했고, 아이들끼리만 두고라도 시간을 내야 했던 게 맞다. 원장님과 약속한 것은 6개월 뒤였다. 병원 방문 4개월 후에 정기 건강검진이 있었고, 다행히 혹은 자라지 않았고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그래서 무심코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극심해진 코로나로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나는 백신 1~2차를 맞았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던 코로나는 줄어들지 않고, 더 심해져 갔다. 아이들은 겨울방학을 맞이했고, 무한 육아가 이어졌다.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 개학이 다가오면서 조금 더 편하게 병원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방학이 지나고 개학이 다가올 쯤에 좀 더 자유로운 외출을 위해 백신 3차를 미리 맞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개학 직전인 2월 말에 화이자 백신 3차를 맞았고 난생처음 심각한 주사 후유증에 시달렸다.
다른 사람들이 백신 후유증이 심하다고 했을 때, 나는 괜찮았다. 원래 다른 주사나 알레르기 반응이 없는 편이라 너무 자만했던 것 같았다. 백신을 맞은 다음 날부터였다. 처음엔 온몸에 피로감과 몸살기운이 몰려왔다. 팔과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한 뻐근함과 저릿저릿한 느낌이 온몸을 급습했다. 처음엔 몸살감기였다가 그다음은 목감기, 코감기, 기침감기 순으로 부작용이 왔다. 짱짱했던 체력이 10여 일 릴레이 감기증상으로 바닥나버렸다.
2주 정도는 피곤함에 찌들어 안마의자에 누워있었던 것 같다. 안마의자에서 안마를 받다가 잠들기도 하고, 소파에 잠시 누웠다가 오전시간을 다 가도록 낮잠을 자기도 했다. 가끔 알 수 없는 피로감이 몰려왔고, 잠이 왔다.
"봄이 돼서 그런가, 이상하게 피곤하네. 내가 원래 낮잠을 안 자는데... 자도 자도 피로가 안 풀려."
날마다 소파에 널브러진 게 미안해서 남편에게 변명 아닌 변명처럼 말했던 것 같다. 주말에 장거리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엔 유독 더 심했다. 아이들이 개학하면서 시간적 여유도 생겼고, 딱히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없었다. 다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있었지만 그것이 몸에 무리를 줄 정도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날인가 샤워를 하고 문득 거울을 보니 이상했다. 겨울 내내 코로나 핑계로 너무 집에 있었던 것이 문제였나? 몇 년간 이어오던 수영도 끊고, 외출을 삼가고, 아이들과 온종일 붙어있다 보니 살이 많이 쪘었던 것 같다.
본래 아주 작은 가슴도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가슴이 너무 커 보여서 이상했던 것 같았다. 생리 전 후 호르몬 변화가 심한 편이라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코로나가 좀 진정되었으니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생리가 끝나고 가슴은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3월 새 학기가 돌아왔다. 유치원이던 둘째 딸아이는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입학했다. 이제 고학년이 된 첫째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둘째 때문에 몸보다 마음이 더욱 바빠졌다. 코로나가 진정되면서 그동안 가지 못했던 여행을 가려던 남편은 여행계획을 세웠다.
책출간을 계획했던 나는 나의 자기 계발과 아이들의 육아 및 교육, 코로나 시간 엉망이 된 집안 살림에 대한 여러 가지 불필요한 고민을 몰아서 했던 것 같다. 코로나 기간 동안 초등 저학년인 아이는 사춘기 소녀로 성장했고, 아이의 학교생활과 친구관계, 아이의 불안함과 사춘기 키성장 문제까지 고민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시간과 돈은 한정되어 있고, 그걸 얼마나 알차게 쓰느냐는 '엄마의 능력(?)'이었다. 같은 돈이 있어도 누군가는 아이의 교육에, 누군가의 아이의 성장에, 누군가는 부모의 자기 계발과 취미에, 누군가는 여행에 투자한다. 내가 어느 분야에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가 공부를 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할 수 없고, 가족들이 여행을 가자고 한다면 무조건적인 반대만 할 수도 없다.
사춘기 때 나는 스스로 잘 살아낸 '학생'이었다고 생각했다. 대학생의 나도 스스로 잘 살아낸 편이었고,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도 힘들지만 잘 견뎌낸 편이었다. 그때는 나하나, 내 몸 하나만 신경 쓰며 살았던 거에 비해, 가정을 이루고 엄마와 아내와 며느리가 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많은 일에 신경 써야 했다. 잘하는 것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살림과 육아라는 일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재밌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약간의 우울감과 스스로 못나 보이는 무기력증이 함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정신이 바짝 들어 청소를 하고, 책을 읽었다. 어느 선에서는 놓았어야 했다.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인정하고 포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놓고 싶지 않은 나의 '완벽하고 싶은' 욕심은 하나도 제대로 못하고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 같다.
어느 날인가는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었고, 어느 날인가는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인정도 못 받는 삶이 너무 처량하고 한탄스러웠다. 10년 동안 달리기만 하다가 체력이 소진된 느낌이었지만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자유가 없었다. 누가 나를 묶어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몰아세운 것도 아닌데, 나는 나 스스로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메여있었다.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위해서 10년을 똘똘 뭉쳐서 살았던 것 같다.
나도 이제 나를 위해 좀 시간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고, 틈틈이 예전에 작업했던 글을 수정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흔이 되기 전에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놓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이고 싶었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었다. 내가 놓지 못하고 질질 끌고 있으니 하늘에게 강제로 그걸 끊어주려 하셨던 걸까?
어느 날 겨드랑이와 가슴살에 콩알만 한 멍울이 만져졌다. 기분이 싸했다. 나는 검색하기 시작했다. 간혹 코로나 백신을 맞고 멍울이 생겼다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백신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도 없어질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멍울은 없어지지 않았고 어느 날 보니 동전크기만큼 커져있었다. 나는 멍울이 커지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암이 아니더라도 멍울크기를 봐서는 맘모톰 시술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고, 혹을 제거하기 위해선 수술에 버금가는 큰 고통(?)이 따라올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순간 멍청하게 또 시간과 돈, 그리고 편리함을 계산했다. 그래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다. 병원까지 가는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남편이 쉬는 날을 기다렸고, 남편이 쉬는 날엔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갔다.
가슴은 커졌다 작아졌다 월경주기로 변했다. 아이들을 보내고 조금 한가한 시간을 찾아 병원을 방문하려고 계획했지만 시간이 가도 바쁜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봄에는 병원을 가려고 마음먹었는데, 남편은 가족들과 부산여행을 계획했다. 집순이는 나는 여행 계획을 듣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실 남편뿐 아니라 집순이는 나 조차도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라 가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그래서 나는 또 멍청하게 병원 가는 날을 미뤄버렸다. 한가한 시간은 끝내 오지 않았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올 때는 일단 일상을 중지할 줄도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