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없이도 살아내는 방식]
저녁이라는 말은 하루를 한 번 더 어루만져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온종일 단단하게 매듭 지어 있던 마음이 부엌의 불빛 아래에서 천천히 풀리는 시간
누군가는 장보기 메모를 미리 적어두고 칼끝을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여야 비로소 저녁이 시작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반대편 어딘가에서 저녁을 맞는다
어떤 날의 저녁은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시작되고 어떤 날의 저녁은 손에 쥔 컵을 내려놓지 못한 채
마음이 먼저 움직일 때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
정해둔 순서도 누군가에게 배워둔 조리법도 이 시간 앞에서는 조용히 사라지고 대신 오늘의 몸이 기억하는 온도 지금의 마음이 닿고 싶어 하는 맛 그 미세한 감각이 먼저 떠오른다
싱크대 앞에 서서 문을 살짝 여는 순간 하루 중 말하지 못한 생각들이 찬칸 구석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고
남아 있던 야채 몇 가지와 어쩌다 사 둔 빵 조각과 절반쯤 남은 소스들 사이에서 오늘의 나와 결이 맞는 것을 한참 바라보게 된다
무엇을 먹을지보다 지금의 나를 어떻게 돌볼 수 있을지 묻는 시간이 길어져 멍하니 서 있다가 서서히 손이 움직이는 저녁
어제 남은 야채와 오늘 산 빵이 어색한 듯 자연스레 한 접시를 채우는 날도 있고 물 끓이는 소리조차 피곤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온기가 필요해도 굳이 불을 켜지 않고 찬물에 면을 말아 간장 한 방울로 맛을 붙이며 아 오늘의 나는 이 정도면 되었구나 뒤늦게 알아차리기도 한다
이건 게으름과는 거리가 있다 나를 내버려 둔다는 말과도 다르다 어떻게든 챙겨 먹어야 한다는 의무보다 지금의 나를 이해해 보려는 작은 시도에 가깝다
그 문장 하나를 옆으로 밀어두면 음식은 생각보다 쉽게
나와 닮은 무언가가 된다
손끝이 먼저 닿는 재료와 입 안에서 오래 머무는 맛 사이에서 조용한 연결이 생기고 그 연결은 레시피에 적힐 이름을 갖지 않지만 오늘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은근한 표정 하나로 남는다
물 끓는 소리를 기다리는 느린 시간
불을 올렸다가 낮추었다가 다시 올려보는 서툰 조절
누군가에게는 불필요한 과정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타인의 속도에 맞춰 하루를 흘려보낸 마음을 다시 나에게 되돌리는 연습처럼 느껴진다
이런 저녁은 꼭 맛있지 않아도 된다 싱거운 날도 있고
조금 짠 날도 있고 기대와 멀어지는 맛이 나는 날도 있지만 그릇을 비우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 덜 복잡해지고 오늘의 내가 만든 저녁이 오늘의 나를 숨김없이 드러냈다는 사실이 조용히 나를 편안하게 한다
삶도 아마 이런 모양일 것이다 정답에 맞추기보다 그날그날의 나를 먹여 보내는 일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마음의 모양을 어떻게든 끌어안아 보는 일
계획 없는 삶이 불안에 가까운 날도 있지만 그 안에는 말로 다 옮기기 어려운 생기가 있고
장바구니 대신 내가 오늘까지 견뎌 낸 마음들로 차려진 작은 식탁 그 위에 천천히 올려두는 나만의 접시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도 혼자 앉아 있어도 가장 나다운 순간은 대부분 저녁 무렵에 찾아온다는 사실을 나는 부엌에서 천천히 배우는 중이다
나는 종종 레시피보다 마음을 따라 저녁을 만들고 어쩌면 레시피 없이 살아가는 연습을 조금 길게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금 느리고 조금 서툴러도 괜찮은 속도로
내 취향이 지펴 올린 온도에 오늘을 잠시 담가 두었다가
조금씩 나에게 가까워지는 날들을 이 작은 불빛 아래에서 조용히 익혀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