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반. 퇴근한 남편의 도어록 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부엌으로 가서 가스불을 켰다. 냄비에 마트에서 사 온 양념닭주물럭을 넣고 파와 양파, 콩나물까지 씻어 넣고는 보글보글 볶았다.
남편은 빨리 퇴근하고 싶어서 자주 저녁밥을 거르고 야근을 했고, 나는 그런 남편과 저녁을 함께 하기 위해 밥을 거른다. 우리는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 10시 반에 저녁을 먹곤 한다. 메인 메뉴인 닭 주물럭과 하이볼 한 잔씩. 늦은 밤이라 밥은 먹지 않았다. 닭 주물럭을 다 먹고 난 다음에 2차로 과자 한 봉지 털어 넣긴 했지만.
늦은 저녁은 평일의 시작을 알려주기도 했다. 많은 시간 함께하는 주말과 달리 평일에 유일하게 얼굴 맞대는 시간. 매일 똑같아 보여도 조금씩 다른 나의 오늘의 시간을 남편에게 재잘거리기도 한다.
오늘은 몇 달간 쉬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도 했고, 오랜만에 친구와 전화통화에 만남까지 약속한 날이었다. 그 외엔 평소와 똑같이 아이를 돌보고, 학원을 데려다주고, 씻기고, 밥을 먹이고 재우는 평범하고 평범한 일상.
아이가 학원에 가있는 동안 아침, 점심 밀려있던 설거지를 끝내고 앉아서 빨래를 열심히 개고 있었다. 수건도 개고 아이들 속옷도 개고. 세탁기에는 다른 빨래가 또 돌아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멍하니 빨래를 개고 있자니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적막한 집 거실에서 지극히 평화로운 일상이 불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우울이 찾아왔던 날도 그랬다. 평화롭다 평화롭다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는 날들이었다. 안정감 있게 되풀이되던 하루하루. 그런 하루 속에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평범한 시간 속에서 나를 찾지 못해 헤매던 시간.
오늘도 그날과 비슷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적막이었음에도 어딘가 생소한 조용함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아, 그때도 이랬었나. 곧 우울해질 것 같은 기분. 돌아가고 싶지 않아도 무섭도록 적막하고 고요함이 나를 기어코 어두운 생각 속으로 끌고 갈듯한 기분 나쁨. 어제도 그제도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도 분명 그럴 것이다.
다행인 건 이번 주까지 방학인 아이가 학원가는 시간 외에 나와 함께 집에 있어준다는 것이다. 아이는 내 옆에 다가와 실없이 웃기도, 농담을 하기도, 조용히 책을 읽기도 한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나는 다시 안도한다. 불안하지 않고 안전한 평화로움을 느끼며.
이런 평화로움은 이번 주가 끝이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아이는 개학을 하고 학교에 간다. 나는 생각보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다. 다음 주. 남편이 출근을 하고, 아이도 학교에 가면 나는 긴 시간 혼자 집에서 무섭고 위험한 적막을 견뎌야 한다.
혼자 어둠 속에 나동그라지지 않기를. 웃으며 나를 바로보기를. 단단한 시간을 보내기를. 바란다. 부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