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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내 꿈은 흑백이라서 정말 오래된 것 같아

by 장민혜

오래전 나의 꿈은 천체 물리학자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했고, 우주와 별과 관련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으니까. 하지만 천체 물리학자는 실제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보다 수학 계산을 무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일찍 접었다. 이후 나의 꿈은 계속해서 변했다. 어느 날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어느 날에는 예고에 진학할 정도의 실력은 된다는 말에 플루티스트가 되고 싶기도 했다. 꿈은 바뀌었지만, 어느 꿈을 향해서든 열심히 달리면 다 될 줄 알았다. 적어도 내가 글을 쓰면서 깊은 고민에 빠지기 전까지는.


슬럼프는 꽤 오랜만에 찾아왔다. 몇 년을 주기로 한 번씩 찾아오는 슬럼프는 대개 며칠이면 사라졌다. 그러나, 이번 슬럼프는 몇 주가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외부적인 사건이 만들어 낸 슬픔에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강구했지만, 쉽게 정답이 나오진 않았다. 늘 외부적인 상황이 문제였다. 내적으로는 그저 게으름이라고 치부할 뿐인 것들이 외부적인 상황과 맞물리자 글을 더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나를 내몰았다. 올해 들어서 벌어졌던 몇 가지 일이 그러했다. 어느 중소 문예지에 수필 부문으로 응모를 했다. 신인상이었다. 신인상 발표가 없기에 탈락인 줄 알았는데, 돌연 합격했으니 소감을 보내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틀 뒤, 발행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발행인은 내게 “한 권에 2만 원씩 20권을 사야만 등단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나에게는 그럴 만한 돈이 없었다. 웹소설 전업 작가로 뛰어든 이후, 부가적인 일들은 하고 있었지만 수중에 몇십만 원도 없는 게 나의 인생이었다. 어머니가 혈액암으로 투병을 했을 때에도, 동생이 사고를 쳤을 때에도 집안의 맏이인 나는 내가 다 책임져야만 하는 일인 줄 알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책임진 결과 ‘내가 했던 것’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엄마는 내가 듣는 것을 알면서도 “대박 난 소설도 없으면서 집에서 글이나 쓰는 소설가”라며 나의 얼굴을 모르는 아주머니와 통화하고 나를 비웃고, 내 동생 역시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나의 꿈은 늘 흑백이었다. 단 한 번도 색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기다리다 보면, 정진하다 보면 언젠가 빛을 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있다. 그러나, 그건 헛된 상상에 불과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늦게 빛을 보는 예술가도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 글은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고루하기 짝이 없으며, 지루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글을 쓰는 내가 과연 언젠가 소설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이번 슬럼프는 지독했다. 모든 것을 회피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기 위해 온종일 잠들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일어나서 외부 상황들을 생각하려고 하면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다시 잠드는 일의 반복이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의 끝에는 헛된 희망을 품었던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 뒤따랐다. 어차피 너는 되는 일이 없었잖아, 되는 일이 없었는데 뭘 바라는 거야, 어리석게 욕심을 내고 싶었어? 정말 그것들이 너에게 필요한 것들이 맞아? 나에게 끊임없이 묻는 말들. 나는 이런 말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난 줄 알았지만, 미성숙의 결과물인 셈이다. 미성숙한 인간이라서, 서른줄을 넘어서고도 어리석은 인간인지라 하염없이 안 되는 것에 희망을 걸고 포기할 줄 모른다. 이런 내가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왜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도 꿈을 꿨다. 역시나 내 꿈은 흑백이었다. 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채색으로 뒤덮인 찰리 채플린의 방송 같은 화면을 우스꽝스럽게 보다가 깨어났다. 그러자 현실이 이어졌다. 현실은 늘 내게 고독함을 심어줬고, 때로는 그 고독마저 아까운 감정이라는 듯 앗아가기도 했다. 버텨야만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지하면서도,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게 바로 지금이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해 보자, 딱 한 번만 기다려 보자, 그렇게 딱 한 번……. 딱 한 번을 기다린다는 것이 스무 해 가까이 흘렀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예술은 재능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나는 재능의 영역이 아니라 오래오래 글을 쓰고 읽는 놈이 승리하는 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군가는 나에게 글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결국 글로 무언가를 조금씩 이루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내 꿈은 흑백인 상태로 머무르고 있지만, 아주 조금만 더 도전을 해 보면 안 될까. 미련이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라도 딱 한 번만 더……. 그렇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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