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하고 싶을 때 믹스커피

by 무유

자기 전부터 생각한다.

아침에 내려 마실 드립 커피 한잔.

씁쓸하면서도 산미가 있는 에티오피아 커피 한잔의 쾌락을 위해 아침밥을 챙겨 먹는다.

전기포트의 물이 100도씨까지 끓다가 80도까지 떨어질 때까지 기꺼이 기다린다.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그제야 온전히 잠에서 깨어난다.


이런 게 중독이란 걸까.

중독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게임도, 담배도 해 본 적 없지만

커피에게는 지고 말았다.

사실 커피가 좋아 종일이라도 마시고 싶지만 몸은 카페인을 관대하게 수용하지 않는다.

오전에 딱 한잔.

내가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양이다.

괜스레 오후에 커피가 당겨 한잔이라도 더 했다가는 그날 잠은 다 잔 셈이다.


드립커피가 대중화되기 전,

그러니까 8-90년대 초반에는 둘둘둘이 서민들이 마시는 커피의 대세였다.

커피가루 2, 설탕 2, 프림 2

하지만 그 시절에도 엄마는 남대문시장 미제제품을 팔던 곳에서

테이스터스 초이스 알커피를 사서 블랙커피를 마셨다.

블랙의 쓴맛이 좋아서였을까.

글쎄 노인이 되어도 피자와 콜라를 즐기는 엄마의 입맛에는 썩 맞지는 않았을 거 같다.


우디 앨런의 영화 ‘블루 재스민’에 나오는 재스민처럼 화려한 라이프를 동경한 엄마.

하지만 한 번도 화려한 삶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그녀.

엄마에게 미제 블랙커피 한잔은 어떤 의미였을까.


반면 재스민과는 정반대인 아빠.

80세이지만 평생을 검소함과 절제적인 삶을 추구하시고,

근력 운동을 하신 덕분인지 사위들보다 체력이 좋으시다.

가족 단톡에는 아빠가 올린 건강 정보가 차고 넘친다.

‘아침에 먹는 사과 한 알의 효과, 운동하니 이렇게 삶이 바뀌었어요, 감사함으로 시작하는 하루’ 등

건강한 삶에 대한 애정이 유독 남다른 분이다.

심지어는 자신이 모은 정보를 취합하고, 일찍 돌아가신 막내 고모에게 쓴 편지를 덧붙인 글을 제본하여 주변에 나눠주기도 하였다. 아빠가 할 수 있던 일종의 자가 출판인 것이다.


한 가지 미스터리 한 것은 아빠의 커피믹스 사랑이다. 요즘은 후식으로 나오는 식당의 자판기 커피도 블랙을 선택할 수 있건만, 아빠는 굳이 프림이 들어간 달달한 커피믹스를 찾으신다. 감기기운이 있어도, 배탈이 나도 커피 믹스 한잔만 마시면 완쾌된다고 믿으시는 것이다. 주름 가득한 아빠의 얼굴이 믹스 커피 한잔으로 피는 것을 보면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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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궂어서일까. 오늘은 왠지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난다.

모닝 드립 커피를 마시고 커피를 더 마시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잠을 포기해서라도 왠지 한잔 더 하고 싶어졌다. 테이스터스 초이스 블랙커피를 마시던 젊은 엄마와 커피믹스는 보약이라고 생각하는 늙은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을까. 몇 년 만에 마셔 보는 달달한 믹스 커피. 마시고 나면 프림 때문인지 위가 울렁거리는 믹스 커피. 오래된 찻잔에 믹스가루를 탈탈 털어 넣는다. 팔팔 100도씨까지 끓인 물을 붓고 저으며 생각한다.


다양한 커피의 종류만큼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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