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아이들 학교에는 널찍한 카페테리아가 있었는데 요일별로 메뉴가 달라서 이것저것 먹어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스쿨뱅크에 미리 돈을 넣어두고 먹을 때마다 차감되는 방식으로 매번 거의 열 자리쯤 되는 개인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번호를 잊어버려서 점심을 못 먹을까 봐 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을 가방과 옷 주머니 등 여기저기에 넣어주었는데, 걱정한 것이 무색할 만큼 아이들은 금세 자신의 번호를 외웠다.
첫 일주일은 매일매일 달랐던 급식 메뉴에 대해 신나게 얘기해 주었다.
어떤 건 완전 자기 스타일이라 맛있었는데 어떤 건 정말 우웩 이었다고도 하고, 과자나 젤리 같은 간식도 살 수 있어서 엄청 재밌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미국식 급식에 익숙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이주정도 지나니 아이들은 점심에 밥이 먹고 싶다고 했다.
밥은 집에서 많이 먹으니 점심 한 끼 정도는 햄버거나 샌드위치, 너겟 같은 게 맛있지 않냐고 달래 봤지만 아이 둘 모두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길 원했다.
할 수 없이 아침부터 다시 냄비밥을 짓기 시작했다.
도시락 메뉴는 간단했다.
흰밥에 반찬 한두 개, 볶음밥, 삼각김밥, 샌드위치 정도였다.
처음엔 다른 아이들이 싫어할까 봐 김치 같은 향이 강한 한식종류는 피했는데, 인도인들이 많은 학교라 그런지 향신료에 대한 편견이 많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점점 볶은김치나 김치,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아찌나 젓갈도 싸주게 되었다.
혹시라도 쓸 일이 있을까 싶어 한국에서 가져온 보온도시락이 빛을 발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스포크까지 챙겨 온 나 자신을 또 한 번 칭찬하며 매일매일 도시락을 싸다가 아이들이 그나마 좋아하는 메뉴가 나오는 요일엔 급식을 먹는 걸로 합의를 보고 주 3회로 횟수를 줄였다.
도시락을 싸야 하는 날은 꿈에서도 메뉴를 고르고 있을 정도로 처음엔 그 스트레스가 상당해서 5회에서 3회로 이틀이나 줄어드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점심시간 외에 오전과 오후에 리세스(recess) 시간이 있어서 간단한 간식도 준비해 가야 했다.
리세스는 말 그대로 아이들이 교실 밖에서 대화를 하거나 놀이를 하는 휴식 시간을 말한다.
무조건 교실 밖으로 나가서 날씨가 나쁘지 않은 한 운동장에서 15분 정도 뛰어놀다 들어오기 때문에 그 후에 간식타임을 갖는다.
처음엔 신나게 온갖 과자들을 싸갔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한 학교에서의 합법적인 군것질 시간이 아이들에겐 너무 재밌었던 거다.
하지만 마트에 있는 수많은 종류의 과자들을 보고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다 먹어보겠다는 큰 포부를 자랑하던 아이들은 점점 과자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그래, 어디 한번 원 없이 먹어봐라.' 하고 매번 과자를 잔뜩 골라올 때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는데, 아이들이 먼저 과자에 슬슬 질려가고 있었다.
간식까지는 내가 챙겨주지 않고 각자 통에 그날 먹고 싶은 걸 담아가기로 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아이들은 과자대신 과일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카페테리아에서 사 먹던 과자나 젤리들도 슬슬 질리는 듯했다.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더 한식을 찾고 건강식을 찾는 걸 보니 갑작스레 늘어난 패스트푸드에 대한 한계점에 다다른 게 아닐까 싶었다.
어릴 때 엄마가 싸주시던 따뜻한 보온도시락도 생각났다.
매일매일 따뜻한 국까지 챙겨주셨던 건 정말 보통일이 아니었구나.
아이들이 별로 맛이 없다고 불평하던 한국식 급식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 지도 새삼 느꼈다.
따듯한 밥에 매일 다른 반찬 서너 가지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건강한 식단이었는지...
하루 세끼 식사준비에 도시락까지 챙기게 된 나의 미국 생활은 '의식주' 중 단연 '식'이 70%를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보며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나고, 가장 많은 지출을 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갑작스럽게 변한 생활패턴과 단순해진 일상에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이것 또한 이때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라고 생각을 정리하니 그것 또한 즐거웠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