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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바텐더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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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Dec 30. 2015

bartender 19

비밀의 정원. 3

나는 그를 평가하지 않았고, 그의 이야기 속에 있는 모순이나 비상식을 구태여 밝혀내려 하지 않았다. SF영화나 환상소설을 읽을 때, 그것이 비현실적인 것을 알지만 우리는 작가의 설정에 맞추어 나의 상식을 그 세계의 법칙에 맞추어 즐길 수 있다.

작가는 귀가 뾰족한 불노불사의 종족이 사는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고 방사능의 힘으로 변하는 초록색 괴수의 신체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할 수도 있다.


적어도 이야기의 세부 구조를 자아내는 능력에 있어서는 재벌 3세는 출중하였고 때문에 그럭저럭 그의 정원에 들어가서 거짓의 씨앗에서 자라난 기괴한 식물들을 감상하며 산책 할 수 있는 여건은 만들어 진 셈이다.

그게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그를 조금 더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과시하지 않았고, 그도 내게서 그 것을 찾지 않았다. 그는 매우 혹독한 미인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는 그 평균점에도 한참을 못 미치는 저 밑바닥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었다.(실제 그는 나에게 ‘이런 일을 하기에는 외모가 많이 딸리시네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 둘 사이에서는 성적 긴장감이 전무하였고, 그 이유로 나는 그와 나와의 관계를 시한부적으로 관망하였다. 그런데 4년이라니.(이제 곧 햇수로 5년이 된다.)


그가 나만을 찾아다니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자주 올 때는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방문할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두세 달이 넘도록 그림자도 비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럼 생각했다. 돈이 떨어졌거나, 다른 새로운 매력적인 바텐더를 찾았거나.

하지만 먼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탕아처럼 그는 언제나 나를 다시 찾아와 주었다.     

 

“정말 매력적인 여성을 만났어요. 일반인은 갈 수 없는 가게에서 일하시는 분인데... 어휴, 연예인급 외모에 그 몸매가 아주... 하지만 너무 욕심을 부리시더라고요. 절 남자로 욕심내시는데, 전 아내가 있으니까요, 정리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는 마치 긴 홍수 끝에 수위가 가득 찬 댐의 물을 방류하는 것처럼 방대한 양의 이야기를 서둘러 풀어내곤 했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 허기를 쫓으려 밥을 쑤셔 넣듯이 급하고 절박하게.     

나는 그가 어쩌면 지독히도 재능 없는 작가 지망생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다. 그의 인생사나 그의 경험담은 한 사람의 인생이 이럴 수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드라마였다. 진부한 설정과 사건들은 일부러 진열해 놓은 취미 고약한 졸부의 장식물처럼 계획적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는 그러한 자신의 창조물을 누군가에게 보이지 못하여 안달이 나 있었다.


그에 대해 탐구하고 추측할수록 나는 그가 점점 가여워 졌다. 젊은 시절 하얗게 창백한 등을 밝히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글들을 써내려가는 그가 떠올려졌다. 쓸모없는 공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생활을 위하여 본인에게 아무 가치 없는 노동에 전념하면서도 언젠가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다짐하고 연이어 실패를 맛보는 그의 과거가 보이는 듯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동정하였고, 그를 계도해 주고 싶었다. 감히 그런 시도를 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매우 소심한 사람이기에 섣불리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할 만한 말을 던지지는 못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비밀의 정원의 문을 열고 현실의 바람으로 환기를 시키는 방법을 택하였다.      


“나는 손님이 더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술도 좀 줄이시고, 그냥 좀 이런 것보다는 더 도움이 되는 시간을 가지시는 게 어떨까 싶어요. 그리고 솔직히 이제 손님한테 더 술을 팔고 싶지 않고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니요. 저한테 실수한 거는 없지요. 저야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 말고, 손님 스스로에게 어쩌면 계속 실수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제가 그 일에 도움을 주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드네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요. 제가 뭐 이상합니까?”     


“이상하진 않고요. 음... 저는 손님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천성적으로 순하시고, 정의로우신 면도 있고, 독하지 않고 정이 깊은 면을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실,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다시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네요. 손님은 지금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행복하게 사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고작 이정도의 대화였지만 나는 그가 아주 잘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그는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타인이 자신에 대해 하는 말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신경을 쓰고, 과민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래서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치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니까.

나를 정신적으로 시달리게 한 복수의 의미로 망치를 들고 휘둘러 그를 둘러싼 온실의 얇은 유리벽을 산산조각 내고 싶은 욕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소심한 평화주의자이다.       


그 대화 이후로 그는 한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고민 정도는 해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물론 나의 몇 마디 말이 그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도 그를 아끼는 사람이 한두 명쯤은 있을 것이고, 재벌 3세 역시 하루 중 일분일초라도 지금 자신의 상황에 대해 고찰해보는 시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확신, 그래서 나의 말이 그것들과 합쳐져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를 변화시키는 데 작게나마 일조한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는 들었다. 우리 가게에 들르지 않았던 그가 주변의 다른 가게에 매일같이 출근하면서 더 많은 돈을, 더 많은 시간을 탕진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사실 내가 그에게 뭘 한 것도 없고, 그 때문에 손해를 본 것도 없건만 왜 이렇게 커다란 배신감이 드는 것일까. 그의 터무니없는 거짓말과 그것을 견뎌야 했던 시간보다도 저 행동들이 나를 가장 화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화사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 너무도 반갑게 그를 자리에 앉히고, 술을 바 위에 깔고, 천연덕스럽게 다시 열린 그의 정원으로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며 최선을 다해 그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그래, 어차피 다른 데서 당신의 돈과 시간을 낭비할 것이라면은, 그렇다면 그냥 내가 그 단물을 가져가 줄게. 경쟁가게에서 무의미하게 버릴 돈이라면, 당신의 인생이 고작 그런 가치 밖에 되지 않는 다면 그걸 내가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받아서 낭비해 줄게.


나는 그와의 관계를 철저히 호구 손님과 바텐더로 선을 긋기로 했다. 믿는 척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의 이야기가 제 아무리 지겨워도, 바 위에 올라가는 술병의 금액을 머릿속으로 카운트 하다보면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우리의 사이는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 나에게 그가 문자를 보냈다.     


-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요. 날 잘 아는 분이니 어쩌면 좋을 지 대답해 주세요.

부담되면 답하지 마세요......     


그것은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인간적으로 대했던 그 날, 그 대화, 그 후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그가 내게 보내는 응답이었다.


나는 갈등했다. 이미 나에게 그는 호구 고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관계가 익숙하고 편해져 버렸다. 나는 그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에게 어떤 가이드라인도 제시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몇 시간, 바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그의 환상을 정성스럽게 들어주며 그의 스트레스를 일시적으로 풀어주는 정신적 안마사? 그 정도의 위치이지 그의 심리 치료사도 아니고 그의 구루도 아니다.     


거대한 바위 같이 굴러온 그의 문자를 나는 애써 무시하였고, 그 뒤로 또 한동안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혹시 그것이 내 책임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내 옆에 굴러온 바위는 내 힘으로 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그가 결국 못다 이룬 꿈과, 수렁 같은 현실에 지쳐서, 그가 만들어 낸 거짓된 정원의 실체를 뒤늦게 돌아보고 난 뒤에 그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모든 걸 포기하면 어떻게 하나.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다시 멀쩡한 얼굴로 나타났다. 조금 여윈 모습으로.

나는 우습게도 또 분노했지만, 그래도 몹시 안도했다. 다시 종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음이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우리의 사이는 조금 달라졌다. 그는 변하였다. 아니 변화를 꾀하는 중인 것 같다.     


“솔직하게 이야기 해봐요. 내가 어떤 사람인 것 같나요?”     


“제가 모란씨한테 어떻게 보이나요?”     


“혹시, 가게 밖에서... 그냥 따로 만나 이야기하자면 해줄 건가요?”     


4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질문들과 요구, 그는 변하려고 하고 있었다. 몹시 취했을 때만 하는 말들이지만 그는 확실히 달라졌다.

내가 과거에 열어두었던 그 작은 창문이, 그 연약한 한 줄기 바람이 그에게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모르겠다. 나는 어떤 태도를 그에게 취해야 할까. 분에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돈을 술값으로 탕진하면서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가짜 재벌3세.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나는 그가 변하기를 바라는가.


오늘도 나는 온갖 모순된 감정으로 뒤범벅이 된 체 기다린다. 진한 섬유유연제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나의 재벌 3세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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