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바텐더 18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란 Nov 25. 2015

bartender 17

비밀의 정원. 1

문자를 한 통 받았다.


-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요. 날 잘 아는 분이니 어쩌면 좋을 지 대답해 주세요. 

부담되면 답하지 마세요......


고민을 하소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사람들이 청하는 것은 내게 드문 일이 아니다. 

직업적인 이유에서나, 혹은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어쩐지 나에게는 쉬이 경계심을 풀며 다른 이에게는 차마 말 못할 고민들을 주섬주섬 풀어놓는다. 그러한 행동들이 매번 달갑지는 않지만, 크게 생각하면 그래도 이들이 나를 믿고 있거나 편케  생각하는구나 하고 가능한 기꺼이 받아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뜬금없이 터져나오는 '사실은 말이야.', '나 요즘 정말 힘들어.'로 시작되는 말들이 내게는 매우 익숙하다. 그럴 때면 나는 가능한 한 화자의 하소연이 막힘없이 굴러갈 수 있도록 마음을 평편하게 가다듬는다. 

내게 들어주는 일의 제 1 원칙은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간단한 룰이 세워지기 전까지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불편한 청자였던가. 그리고 이 원칙이 가장 크게 빛을 본 것은 저 위의 문자를 보낸 남자와의  만남에서였다. 


그와의 만남은 햇수로만 5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나의 가장 큰 단골이었다. 나는 그와 만나고 직장을  세 번 옮겼고,  그때마다 그는 나를 찾아 새로운 바를 방문했다. 

두 번째 가게를 옮길 때는 사실 그를 포함한 어떤 단골에게도 연락을 주지 않았기에 그가 새로 옮긴 가게의 문을 열고 나타났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반갑지 않았다. 새로운 가게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었던 마음과는 또 별개로, 그는 결코 편하거나 즐거운 손님이 아니었기에 그의 낯익은 얼굴을 보는 순간 드는 감정은 낭패감과 짜증이었다. 그러나 나의 직업의식은 자동적으로 만면에 미소를, 입에서는 반가운 환호성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어머, 여기서 다 뵙네요! 설마 제가 여기서 일하는 지 알고 오셨어요?"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왜 연락도 없이 가게를 옮겼죠?"


"아, 전에 가게에서 그다지 좋게 나온 게 아니라서요. 당연히 정리되면 연락드리려고 했죠."


"서운할  뻔했습니다."


여전히 깍듯한 존대어, 딱딱하고 연극적인 어투로 말하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 그는 굉장히 돈이 되는 손님이지. 그렇다고 이성적으로 추근추근 대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 같은 게 뭐라고 이렇게  찾아다녀주기까지 하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했다. 몇 년이나 듣고 들어서 이제는  첫마디만 들어도 그림처럼 눈 앞에 그려지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아마 그것이 책이라면 너무 읽고 읽어서 모든 문장을 외우고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 재벌의 삶에 대한 이야기, 그의 모델 같은 아름다운 부인에 관한 이야기, 천재이자 뛰어난 미술가, 많은 부와 권력을 가졌지만 소시민의 삶을 동경하는 그 자신에 관한 이야기.

그렇다. 그는 심각한 망상증 환자이다. 실제 삶은 어떨지 몰라도 그는 바의 문을 열고 앉는 순간부터 재벌 3세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왜 재벌 3세이냐면, 그에게 한 바텐더가 '그럼 재벌 2세쯤  되나요'라고 질문하자 '정확히는 재벌 3세입니다'라고 딱 잘라 정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그는 재벌 3세가 되었다.)


나는 그와 비밀스러운 정원을 하나 만들었다. 어떤 말이든 진실이 되는 그런 정원. 어떤 허무맹랑한 공상이라도 그가 내게  이야기하면 나에게 그것은 진실이 되었다. 우리가 앉아있는 그 공간에서는. 

몇 년 동안 그의 전속 바텐더처럼 굴면서 그의 헛소리에 나의 정신줄도 놓쳐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그런 공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무엇이라도 진실이 되는 세계. 그리고 재벌 3세는 그 공간을 퍽  만족스러워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가  그 긴 시간동안 특별히 예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는 나를 애써  찾아다닌 것이 아닐까.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은 특별한 손님과 바텐더가 되었다. 

이전 17화 bartender 2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