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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바텐더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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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Mar 02. 2016

bartender 22

짧은 번외.

겨울을 깨뜨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아우성이었지만 아직도 나는 가슴 속 얼음을 품은 듯 몸서리 쳐지는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첫 손님은 오랜 단골이었다. 그는 강한 남자였다. 자신의 주장에 언제나 한치의 의심도 없었으며 무엇을 요구하든 항상 당당했다. 한 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건네는 부탁도 그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는 명령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보기 드문 호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은 손님으로 여겼고 우리는 유쾌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라도 정량 이상의 술을 마시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가지가지 행동들을 하곤 했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고 나는 물러가는 동장군의 마지막 기세에 잔뜩 위축이 되었던 터라 마음이 너그러울 수 없었다.


"철 없이 굴지 좀 말아요. 계속 그럴거면 그만 마시고 집에 가요."


"내가 철이 없다고?"


"네, 나이가 그만했으면 이제 철 좀 들어야하지 않겠어요. 취한 척 하면서 왠 어리광이람."


그러나 금새 나의 위치를 깨닫게 된다. 그가 손님으로 있는 한 나는 그의 이야기를, 주사를, 어리광과 땡깡을 받아줄 의무가 있다. 이 주제넘음을 무마하기 위해 부드러운 농담을 던져본다.


"하긴 남자들은 평생 철이 안든다고도 하죠. 우리가 참아야죠, 뭐."


"왜 남자들은 평생 철이 안드는 걸까."


"글쎄요. 강해서 그런가."


"그럼 약하면 철이 빨리 드나?"


"...... 약한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가장 먼저 깨닫게 되죠. 아마 그래서 철이 빨리 드나봐요."


아무 생각없이 던진 말이었다. 농담과 진담의 경계에서, 취객의 물음에 적당한 답을 나오는 대로 던져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상념에 빠져든다. 내 껍데기는 단골손님과 그럭저럭 담소를 하며 실갱이하고 있었지만 내면은 축축하고 깊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함정에 빠져들어 천천히 함몰되고 있었다.


가장 약한 자 중의 약한 자. 그렇기 때문에 꿈꿀 수 없던 일들과 포기해야 했던 것들. 철이 든 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것들을 가장 먼저 깨닫는 자의 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다르게 조숙하다고 평가받았던 청소년기와 바텐더로서, 한 인간으로서 흔들림 없이 견고한 처세를 유지하는 나라는 사람은 어쩌면 체념과 포기라는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던 것은 아닐까. 세간에서는 그런 나를 보며 철이 꽉 들었다고 평가해 줄 것이다.


나는 나의 앞에 앉아서 그가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에 거침이 없는 한 철 없는 남자를 보았다. 나는 가끔 사십이 넘은 그 남자에게 소년같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는 날 때부터 육체의 강인함과 더불어 파괴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쉽게 포기하지도, 체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철이 들 기회를 번번히 놓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너무 빨리 철이 들어 버린 나는 그것을 부러워 하지 조차 못하였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오래 전 읽었던 소설의 한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이만 생각을 접어야 겠다. 나는 아직 일을 해야만 하고, 이러한 생각들은 업무에 많은 지장을 줄 것이니까.

어떤 날에는 사유하는 것 조차 사치일 때가 있다. 생각을 멈추어도 하루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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