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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바텐더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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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Nov 07. 2015

bartender 15

잠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지금은 비가 오고 있고, 나는 물 한잔을 떠놓고 양갱 한 조각을 즐기며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오늘은 휴일이고, 비가 오는 휴일은 다른 여느 휴일보다 각별히 귀한 까닭에 나는 일 분 일 초를 즐기려 안간힘을 썼으나 결국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전부였다.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낮이 되었든 밤이 되었든 규칙적인 출근시간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비 오는 출근 길을 증오할 것이다. 만원 전철의 축축한 부대낌, 교통체증, 몸을 감싸안는 스산한 한기, 하루 종일 성가시게 붙어 다니는 젖은 옷자락.

우리 바텐더들의 출근길 발목을 무겁게 끌어당기는 것은 위의 것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더욱 큰 고민거리이다.

화사하게 꽃단장을 하고 대문 밖을 나서는 순간, 불길한 습기와 낮아진 하늘, 그리고 이마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신호는 내 입에서 자동적으로 욕이 튀어나오게 만든다.


그렇다. 그 한방울의 물은 신호이다. 오늘 내내 우리가 '진상'들에게 시달릴 신호. 여느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무지막지한 놈들이 몰려들 신호이다. 오늘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편안한 방안에서 뜨겁게 데운 차를 홀짝이며 지금 막 출근하고 있을 동료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날려 본다.


왜, '진상'들은 유독 비오는 날에 대거 출몰하는 것인가?


취객을 상대로 하는 장사이니 진상을 각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보통 하루에 한 두팀의 진상과 실갱이를 벌인다면 비 오는 날에는 세 넷, 많이는 대 여섯 팀의 진상과 언성을 높여야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 화려한 막은 경찰의 출동과 함께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말 진상 대상>을 뽑는다면 그 후보의 대부분은 비오는 날 왔던 놈들이 차지할 것이다.


물이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고 했던가. 그 말은 진실이다. 비와 술, 두가지 물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이 놈들의 감성은 흐르고 흘러넘쳐 타인까지 적시지 못해 안달이다. 처음에는 그저 비오는 소리에 마음이 동하여, 외로움처럼 몸을 에워싸는 한기를 잊어버리려고, 물방울이 맺힌 유리창에 도저히 맨 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옛날 기억들이 떠올라서. 그렇게 술집 문을 열고 들어 온 그들은, 가뜩이나 약해진 이성의 탑 밑바닥부터 술이라는 치명적인 일격을 받고 허물어진다. 그리고 그 잔해에 얻어맞는 것은 우리 바텐더 들이다.




"이 씨발년들, 좃같은 씨발년들아. 너 같은 년들을 가랑이를 찢어서 다 죽여버려야 되는데."


메뉴판을 건네주던 바텐더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와 앉자마자 바텐더에게 폭언을 내쏟기 시작한다. 보통은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서 그걸 빌미로 시비를 붙이는 게 일반적이건만 이 놈은 모든 귀찮은 단계를 생략하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니 너나 나나 시간낭비하지 말고 바로 붙자! 라는 건지.

그러나 대비하고 얻어맞는 것과 기습적으로 얻어맞는 것은 충격과 아픔이 다르다. 일반적인 순서를 지켜 손님쪽에서 싸움을 걸기 위해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 바텐더들은 마음 속으로 '어허 이새끼 봐라.' 하고 자신들만의 메뉴얼대로 대처방법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 날은 링 위에 올라서기도 전에 뒤통수치기를 당한 셈이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노련한 바텐더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아무런 말도 받아치지 못하는 사이에 그 야비한 선수는 마치 연습해 둔 랩을 쏟아내듯이 속사포처럼 욕을 날리기 시작했다.

다른 바텐더들이 뒤늦게 상황을 알아채고 동료를 도와 줄 수 있었다.


"이거 미친새끼아냐! 야 이 씨발새끼야, 왜 와서 시비야 병신같은 새끼가."

"입에 걸레를 싸물었나. 안처먹을 꺼면 꺼져. 거지같은 새끼가."


아마존처럼 늠름한 그녀들의 걸진 반격에 남자는 주춤거리다 이번에는 적나라한 성적 단어로 자신의 욕을 발전시켰다. 이에 질세라 남자의 신체 특정부위의 크기에 대한 다양한 조롱이 우리쪽에서 쏟아져 나온다. 가게 안은 순식간에 초등학생들의 언어 수준으로 주고 받는 소란스러운 성교육 현장이 되었다. 그 남자의 친구가 뒤따라 들어오기 전까지.


"죄송합니다. 이 새끼가 술만 취하면 여자들한테 욕하는게 버릇이라서."


그토록 다채롭고 창의적으로 수식된 여성 성기에 대한 설명을 메아리처럼 남기고 그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사람을 울적하게 만드는 비가 거리를 흠뻑 적시는 그런 밤이었다.





유리잔이 양주 장식장에 몸을 내던지고 몇 평 안되는 가게의 빈 공간을 날카로운 비명으로 가득 채웠다.


"나 무시하냐? 이 개같은 년아?!"


파편 조각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유리잔을 내던진 그 놈이 소리를 지른다.

가득찬 손님으로 떠들썩했던 가게가 무거운 침묵 덩어리에 깔렸다. 북적거리는 소음에 볼륨을 낮춰 놓은 오디오에서 나오는 발라드 곡과 환기를 위해 열어놓았던 쪽창에서 톡톡 떨어지는 빗소리만이 내 귀에 들릴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유리잔만으로 모자랐는 지 이번에는 얼마 남지 않은 위스키 병을 바닥에 내리 꽂는다. 튼튼한 병은 깨지지 않고 둔탁한 소음만 내며 바닥을 굴렀다.

이것은 바텐더들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님을 직감하여 우리는 즉시 경찰을 불렀다. 주위의 다른 손님들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진정시켰다. 그는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는 거친 행위예술을 몇차례 하다가 경찰의 손에 끌려 나갔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약간의 열등감, 까다로운 성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폭력을 행사할 만큼 막 나가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서브를 보던 바텐더도 그나마 이 중에서 그와 제일 친한 바텐더였다. 그녀는 결코 그의 성미를 돋구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상적인 대화와 농담속에 어떤 것이 그의 뇌관을 건드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그는 다른 어느때보다도 무척 예민했던 것 만은 분명했다.





"카스 한병 주세요."


일요일 저녁, 가게는 한산했고 눅눅한 여름 장마의 습한 공기를 에어컨으로도 채 지우지 못하던 그런 날이었다.

처음 보는 유일한 손님은 카스를 한 병 시켜 마시며, 내가 어떤 말을 붙여도 건성으로 대답하며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를 틱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착각하였다. 의미없이 반복되는 동작이나 긴장하여 아무 상관없이 짧은 신음같은 단어도 아니고 뭣도 아닌 음절을 내뱉고 있었다.

그는 나와의 대화에 관심이 없어 보였고, 혹여 그가 정말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빤히 관찰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 싶어 나는 잠깐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2층 창밖으로 보이는 비 내리는 유흥가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다른 바텐더는 휴게실에서 끽연 중이었으므로 그 순간 바에는 그 손님과 나 둘 뿐이었다.


그렇게 한가로이 앉아있던 나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물체가 감지되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절대 보여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반신반의하여 나는 하나 뿐인 손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제발 틀렸으면 하는 예상은 그대로 들어 맞아서 무심코 눌러본 이메일에서 갑작스럽게 살색 사진들이 폭탄처럼 쏟아져 나온 때처럼 내 눈은 원치도 않게 성인 남자의 가장 애지중지하는 부위와 그를 소중히 다루는 남자의 자기만족에 가득한 흐릿한 눈동자를 보게 되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 와중에서도 존대가 튀어나왔다는 것이 참 놀랍지만 나는 저렇게 소리쳤고, 다른 바텐더가 내 소리에 놀라 뛰쳐 나왔다. 내가 좀 더 조용히 말했다면 그녀까지 이런 참담한 꼴을 보는 일은 없었을텐데.

어쨌든 그 변태는 놀랍게도 주머니에서 딱 카스 한병 값의 현금을 바 위에 올려놓고 웅얼웅얼 사과같기도 한 뜻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바지도 제대로 입지 않고 도망갔다. 어떻게 보면 참 계산은 정확한 변태였다고 할까.

그가 작정을 하고 왔는지, 아니면 빗소리와 여자와 단둘이 앉아 있는 바의 분위기와 맥주 한 병에 돌연 충동을 느꼈는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덕분에 그 날, 아니 그 장마가 끝나는 기간 동안 나는 충격적으로 뇌에 박혀버린 그 장면을 피부에 들러붙는 꿉꿉한 습기처럼 떨쳐 내지 못하고 괴로워 했다. 지금은 뭐... 웃으면서 다른 바텐더들과 손님들에게 얘기할 정도의 추억이 되었지만.



비 오는 날의 진상 모음을 쓰자면 일단 한권 분량으로 모자랄 것이다. 따로 전집을 만들어야 할 정도? 비만 오면 거의 팔 할의 확률로 가게에 와서 노래를 불렀던 어떤 온순한 남자도 있고, 나는 보지 못했지만 비 오는 날이면 홀로 술을 마시러 와 덥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옷을 하나 둘 벗어 제끼던 특이한 여자도 있었다고 다른 지역에서 온 바텐더에게 들은 적이 있다. (덕분에 그 가게는 비 오는 날마다 매출이 쏠쏠했다는 이야기가......)


나는 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이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가 오면 술을 마시고 싶어하고 더 빨리 취하며 더 감성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사람들은 그것이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 역시 물끄러미 강물을 바라볼 때나, 까페에 앉아 차창을 때리는 비를 보고 있을 때면 지나치게 감성적이 되어서 나중에 보면 분명 부끄러워 질 글을 끄적거리거나 우울을 토로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곤 한다. 솔직하게 하나 더 말하자면 남자가 그리워 지기도 한다.


왜일까? 일조량이 적어져서? 저기압과 습도의 영향?

떠내려가고 흘러가는 그 모습이 인생과 닮아 있어서? 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나는 이 비가 내리는 지금 이 밤, 따뜻한 차, 다이어트를 위협하는 달달한 양갱,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과 더불어 글을 쓰고 있고, 나의 동료들은 지금쯤 붐비는 손님들과 또 그들 중 몇 몇 섞여있는 진상들과 더불어 재미난 씨름을 하고 있을 거라는 점.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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