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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바텐더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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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Nov 03. 2015

bartender 14

angel's  share.  천사의 몫.


angel's share

천사의 몫.     


이것은 위스키의 손실분을 뜻하는 단어이다. 위스키의 제조공정 중 마지막 단계인 숙성과정에서 오크 통 안에 들어간 위스키 원액은 긴 시간 아름다운 호박색의 액체로 거듭나기를 기다리는 데, 그 때 10년에 약 20~25% 정도의 위스키가 손실된다. 년 수가 더해질수록 더욱 많은 양의 위스키가 증발하고, 30년의 시간 동안 숙성되는 위스키 원액의 손실분은 결코 무시 못 할 양이 되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위스키들이 왜 그렇게 비싼지 조금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천사가 마시고 갔다고 하며 ‘angel's share', 천사의 술, 천사의 몫이라고 말한다.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 컴컴한 양조장의 어둠 속에서, 커다란 오크통의 꼭대기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날개달린 사람들에 관한 유쾌한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상황에 너무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냐?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네가 이 일을 평생 할 것도 아니잖아.”     

한 지인이 내게 뼈아픈 충고를 던졌다. 나는 바텐더를 하고 있지만 이것이 내 유일한 직업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투잡’ 인생으로 낮에는 내가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어떤 것을 위해 준비 중이다.

그러나 ‘투잡’이 말처럼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바텐더는 결코 편한 직업이 아니다. 감정 노동 중에서도 내 생각에는 꽤 상위권의 강도를 자랑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나는 나의 자존감의 성에 악의 없는 칼날을 던지는 손님들의 언행과 내면의 싸움을 벌인다. 무의미하고 한심한 개미지옥 같은 대화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 싸운다. 알콜에 절여져서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적은 수면과 무기력증도 내가 싸워야 하는 대상 중 하나이다.     


그러다 보면 실로 열중해야하는 본업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당장은 들어오는 수입이 급하니까, 내일 모레 월세를 내야 하니까, 매일을 라면과 김밥으로 때우기에는 내가 너무 가엾어서... 적어도 바텐더의 수입으로 나는 구차하지는 않게 살 수 있으니까.

나는 모든 금전적인 어려움을 발 등의 불처럼 최우선으로 해결하였다. 바텐더라는 직업은 나의 구원이자 족쇄가 되었다. 정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은 심신의 피로 앞에 미루어지게 되었고, 목표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바텐더로써 경력이 쌓이고 시급이 올라가고 더욱 프로페셔널하게 될수록 내 발은 그대로 꼼짝달싹 못하는 쇳덩어리처럼 굳어져만 갔다.     


아, 나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구나.

모든 시간이 소실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회색의 신사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나는 아마 그들의 가장 좋은 고객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한 바텐더가 내게 말했다.     


“낮에 해가 떠 있을 때 일어나고 싶어. 언니.”     


그녀는 새벽 4시에 가게의 일을 마감하고 집으로 들어가 알콜로 허기진 위장을 달래는 음식을 먹은 뒤, TV를 시청하거나 인터넷을 하는 등 이런저런 여흥으로 시간을 보낸다.

다른 이들이 깨어나는 여섯시에서 일곱 시 사이에 잠이 들면 다시 눈을 뜨는 것은 출근 시간이 임박한 저녁때쯤이라고 했다. 창문 사이로 익숙한 일몰의 붉은 빛이 좁은 방안을 부드럽게 채워줄 때, 그녀는 우울한 기분과 함께 다시 가게로 나갈 준비를 시작한다.     


“오늘도 내일도 똑같고... 그냥 왜 사는지 모르겠어.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어. 복학? 해야지... 언젠가는 해야지. 근데 그것도 고민이야. 전공이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지금이 편한 것 같아.”     


그것은 소름끼치는 고백이었다. 아직 이십대의 중반의 그녀는 어떤 커리어도 가질 수 없는 이 일에 그대로 안주하고 있었다. 착실히 통장을 불리는 것도 아니었다. 밤에 일을 하다 보니 또래 친구들과 평범하게 젊음을 즐길 수 없었던 그녀는 새벽녘의 인터넷 쇼핑으로 욕구불만을 해소하곤 했다.     


준비되지 않은 맨몸으로 미래를 맞닥뜨리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현실의 곤궁을 택한다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열정은 강력한 원동력이지만 그 화력만큼 많은 연료를 필요로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연료는 그 양이 제한되어 있었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얇고 허술한 텐트에서 빼꼼히 내다본 바깥 풍경은 내가 가진 연료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로 춥고 막막해 보였다. 나는 오래오래 생각했다.     


“바텐더 일 따위는 시간낭비야. 네가 진짜 원하는 일을 하라고. 도대체 술꾼들 대화상대나 되어주는 그런 일이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니?”      


세찬 바람처럼 나를 독려하는 많은 목소리들이 텐트의 벽을 치고 흔들었다. 그런가, 이 일을 오래 하면 할수록 나는 더 많은 시간을 잃어버리게 될까. 나는 가능한 빠르게, 더 이상의 낭비 없이 곧게 직진하여 내가 원하는 골로 달려가야 하는 것일까. 궁핍함 따위는 계산적이고 겁 많은 심장이 만들어내는 기우일 뿐인가.     

고민 끝에 나는 텐트를 접었다. 그리고 그것을 버리지 않고 등에 짊어지고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 적응은 쉽지 않았다.


일단 루틴을 만들었다. 시간 단위로 하루하루를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태엽기계처럼 움직였다. 일정한 사이클이 생기자 몸이 적응하였고 하루는 훨씬 쉬워졌다. 바텐더의 일은 시간을 줄였다. 수입도 줄었다. 당연히 소비도 줄여야 했다. 생각보다 나에게 필요한 ‘물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먹거리에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건강한 신체’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니까.     


그러자 천천히 나의 인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가끔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루틴이 깨지면 많은 시간을 들여 정상으로 돌려놓는 노력을 해야 했다. 희미했던 목표는 차츰 형체를 갖추어 갔고 나는 내 인생의 단기 계획과 장기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내게 바텐더라는 직업은 아무런 경력이 되지 않는다. 내가 술장사를 할 것이 아니라면. 단지 당분간 돈을 벌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나는 돈 때문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할 시간과 열정과 체력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지금 나에게 'angel's share' 이다.     


많은 양조장들이 이 낭비를 막으려고 아마도 노력했을 것이다. 발렌타인 30년은 흔하지만 발렌타인 40년산, 50년산은 희소하거나 찾을 수 없다. 그들이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바꿔 말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뜻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짙은 호박색의 액체가 더 부드러워지고 더 깊은 풍미를 지니게 하기 위한 대가로 그것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천사들은 얼마간의 술을 가져가는 대신  세월만큼 위스키의 가치를 올려놓고 비할 데 없는 특유의 맛을 선사해 주었다.     


나는 뭘 얻었을까. 직업적으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별반 없더라도, 바텐더라는 직업이 내 인생에 어떤 풍미를 더해 주었을까. 사람들은 돈벌이를 위한 이런 활동이 내게 무쓸모하며 악영향을 끼친다고 경고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꽤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난 남자를 잘 알게 되었어.’, ‘타인에 대한 통찰력이 대단해졌지.’ 라고 우쭐대며 잘난 척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나는 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많은 거울들이 손님이란 이름으로, 동료 바텐더들의 모습으로 나를 비추어 주었고, 사람들의 행동들을 고민하다 보면 결국 나 자신에게로 생각이 흘러들어가 나라는 사람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살펴보게 만들었다.     


소실된 만큼, 나는 다른 것들을 얻게 되었다. 그래, 더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 시급 얼마로 퉁쳐 버리기에는 우리의 시간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척박한 땅에 싹을 틔운 탓에 남들보다 느리게 핀다고 한탄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인생을 낭비해야 한다면 그 만큼 다른 것들을 더 가져오는 것이 이득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득찬 연료의 힘으로 한 치의 돌아감 없이 자신의 꿈을 향해 직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생각, 내 방법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적어도 이걸 보라, 바텐더를 한 덕에 졸렬하지만 이런 글이라도 쓸 수 있지 않은 가 말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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