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이틀 사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서울과 파리, 그 날만은 정치와 종교라는 이름으로 읽혔을 두 도시에서의 사건은 나의 sns를 뜨겁게 달구었고 나의 마음 역시 그렇게 만들었다.
나의 지인들은 서로의 정보를 활발히 공유하며, 어떤 이는 현장에서, 어떤 이는 모니터의 앞에 앉아 애도하거나 분노하면서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하여 그 감정을 쏟아 부었다.
많은 대화가 오고 가고 격렬하거나 냉정하거나 어쨌든 화두는 광화문과 파리, 두 도시에 열어두고 공감과 대립하는 글들이 앞 다투어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각에, 술잔을 손에 쥐고 도발적인 표정으로(내 딴에는) 앞에 앉은 어떤 남자에게 '여자에게도 당연히 선호하는 섹스 스타일이 있지요!' 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백치 같은 웃음소리가 마치 남의 것처럼 내 귀에 울렸다.
그 날, 최고의 화두는 광화문과 파리였다. 그 이야기만 하여도 온 밤을 풀어내고도 모자랄 만큼, 나는 목이 쉬어라 떠들어 댈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화려한 앵무새처럼 꾸미고 횃대에 앉아 내가 뻐끔 거렸던 말들은 연애와 유흥, 이상형은 어떻게 되시는데요? 그 근처에 맛집이 있는데... 연예인 누구랑 누가 깨졌다는데 알고 있어요? 요새 살이 너무 쪄서 걱정이에요....
사람들은, 바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텐더들을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어리고 겉보기만 그럴싸한 여자애들을 앉혀놓고 그저 말초적이고 단순한,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을 이야기들만 심심풀이 조로 떠들고 맞장구 쳐주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대에 부응한다.
어느 방향으로 열린 주제라도 나는 기꺼이 맞이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면 즐겁게 동참하여 의견을 나누었고 모르는 것은 성실한 학생처럼 들어주었다.
그러나 두 가지, 정치와 종교에 있어서는 그러지 못하였다. 이것은 나에게, 혹은 바텐더들에게 거의 금기시 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손님과 사이를 두고 바 위에 정치와 종교를 올려놓지 마라.
가령 내가 '첫 만남에서 데이트 비는 남자가 모두 내야지요!' 라는 말로 포문을 열고 전쟁을 시작했다고 치자.
우리는 침을 튀겨가며 상반된 서로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울 것이다. 농담처럼 인신공격을 풀어놓고 비아냥거리며 상대의 말꼬투리를 잡고 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비열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논리도 뭣도 없는 개싸움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은 결국 유쾌한 웃음과 말장난으로 끝날 것이다. 상대방을 껄껄 웃으며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며 나와 술잔을 부딪칠 것이다.
그러나 그 주제가 정치로 돌아선다면, 그리고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손님과 나와의 의견이 갈린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정중한 어조로 그것을 설명한다고 해도 분명히 손님의 기분을 망쳐버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와 종교에 관해서는 상대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표현하기만 해도 그것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듯 ‘음,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하며 감정을 다스리지만 점차 높아지는 음성과 불편함을 숨기지 못하는 미간을 보면서 ‘아차 실수했구나.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얼근하게 술에 취한 성인 남성이 앞에 어린 여자애들을 앉혀놓고 자신의 정치관을 풀어 놓을 때 ‘아니 근데 제 생각 에는요...’ 하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섣부르게 ‘감히’ 의견을 제시했다가 얼마나 많은 술자리를 망쳐놨었던가. 우리에게는 맞장구를 치던가. 그것도 힘들다면 그냥 ‘잘 모르겠는데요?’ 라는 선택지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들은 돌아서서 생각하겠지. ‘역시 골빈 년들은 할 수 없어.’
이 부분을 조금 더 확장하자면, 나는 사실 사석에서도 이러한 경우를 많이 당해봤다.
‘너 같이 말하는 여자애들 남자들이 진짜 싫어하는 거 알아?’
어느 해 대선을 앞두고 각자 지지하는 후보를 내세워 첨예하게 대립했던 그 날, 반대편 후보를 지지하던 한 남자 지인이 내게 마지막으로 던진 공격이었다. 그의 패배를 사실상 인정하는 말이었기에 나는 우습기도 하였으나 더러운 기분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이 여자들에게 기대하는 정치와 종교에 대한 식견이란 바로 이 정도인 것이다.
‘바득바득 기어오르지 말고 딱 내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만큼만 알고 있거라.’
며칠 전에 두 명의 남자 손님이 방문하였다.
일상적인 이야기들로 대화가 진행되었고, 꽤 시간이 흘렀을 때 한 쪽이 돌연 정치적 이슈를 꺼내었다. 다행이 그와 나는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였기에 나는 눈치를 보면서도 함께 대화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나머지 한 손님이 물었다.
“진보가 도대체 뭐야?”
나는 그가 우리의 대화를 우습게 여겨 비꼬기 위해 질문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또 누군가가 기분이 상하고(도대체 왜 사람들은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사실을 마치 얼굴에 침이라도 뱉은 것처럼 모욕으로 여기는 것일까?) 좋은 자리가 망쳐질 가능성이 있기에 나는 대화의 주제를 돌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끼리만 너무 이야기했네요. 우리 다른 이야기해요.”
“아니 진짜 진보가 뭐냐고?”
“사전적 의미를 말하는 거라면...”
남자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나를 위해 그의 친구가 대충 답해주었다.
“아 쉽게 지금 야당이 진보고 여당이 보수지.”
“야당은 뭐고 여당은 뭔데?”
응? 이건 뭐지? 마치 단어를 설명하면 그 설명했던 단어를 다시 물어보는 어린아이 같이 그는 연속으로 질문을 해댔다.
“여당은 집권당이고 야당은 그에 반대하는 당이지요...”
“집권당은 뭔데?”
“정권을 잡은 당이지요...대통령이 선출되거나 의석수가 많은 당....”
“대통령이 당이 있어?”
“........”
그는 화이트칼라이고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래, 그냥 모를 수도 있다. 정치에 정말정말 1그램도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런 사람들을 욕할 자격이 있는가. 그러나.
“저번에 누구 뽑았냐고? ......를 뽑았지. 왜? 그냥 1번이라서.”, “.....는 빨갱이라던데?”
‘두 발 짐승은 나쁘고 네 발 짐승은 옳다!’
동물농장에 등장했던 양들과 저 남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해맑은 그의 물음과 단순한 믿음을 잘못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자리에 앉아 계란을 통째로 삼킨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방긋방긋 웃고만 있어야 하는 것도 바텐더로서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다.(사석이였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넌 그런 걸 어떻게 아는데?”
대충 그 남자의 물음에 대답을 했더니 그가 물었다.
“뉴스나 사설 같은 거 읽어서요.”
“되게 재미없게 들린다.”
그렇다. 또 다시 나오는 그 말. 매력 없고 재미없고 건방진 여자.
그렇게 보인들 상관없었다. 내가 내 신념을 가지며 겉으로 드러내는 것에 반감을 표하는 상대라면 나도 사양한다. 다시 안본다고 해서 내가 아쉬울 것도 없다.
그러나 바텐더로써는 그럴 수가 없다. 나는 그들에게 매력적이어야 하고, 재미를 주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무해해야 한다.
그들의 유쾌한 대화를 위하여, 그것이 어떤 차별적 언행, 어떤 비논리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접고 그들에게 맞추던지 모른 척하던지 해야 한다.
차라리 백치처럼. 그들이 기대하던 그대로 예쁘기만 하고 생각은 없는 인형처럼 말이다.
요즈음의 바텐더들은 그다지 손님의 비위에 예예 하며 맞춰주는 편은 아니다.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반대의견도 서슴없이 내비친다. 말싸움도 꽤 빈번히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 안에도 분명히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키우는 애완동물이 말썽을 피우는 것처럼, 손님들이 용인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우리는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줄을 쥐고 있는 것이 그들인데.
그래 인형이 되라면 되어 줄 것이다. 대신 우리는 술을 팔 것이다. 더욱 비싼 술을 주문할수록 더욱 많은 인내심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노라처럼 이 문을 열고 내가 이곳을 떠나는 순간까지,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한낱 인형처럼, 예쁘고 생각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