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보드카,브랜디,데킬라, 그리고 우리는...3
“난 바텐더가 아니에요.”
A가 말했다. 갸우뚱한 손님을 앞에 두고 그녀는 투정부리는 아기처럼 새초롬하게 툴툴거리면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냥 잠깐 수술비 벌려고 하는 일이에요. 몇 달만 하고 그만 둘 거고 짜증나면 내일이라도 안 나올 수 있다고요.”
“이 일이 뭐 어때서? 너도 나쁘지 않으니까 나와 있는 거 아냐.”
“아이 진짜, 싫다고요. 아빠한테 걸리면 나 맞아죽고요. 이래저래 해도 술집이잖아요. 이런데서 어떻게 오래 일해요. 친구들한테 말하기도 쪽팔리고 짜증나게 하는 손님도 많고, 난 싫어요. 그냥 경험, 경험.”
A의 옆에 함께 앉아있던 바텐더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제 3년차를 넘긴 바텐더였다. 절망적으로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가 그러듯이 매월 말일마다 통장잔고를 확인해야 하는 그런 인생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난 별로 이때까지 내가 이 일 하는걸 뭐 쪽팔리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랬는데, 언니... 모르겠어요. 나 진짜 A랑 일하기 싫어요. 유치하게 왕따까지 할 생각은 아닌데, 왜 우리가 걔랑 같이 일해야 되요? 걘 지입으로 지가 바텐더도 아니라고 하잖아요.”
결국 A는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그녀가 그녀의 안온하고 풍족한 집으로 돌아갔는지, 혹은 다른 바에 가서 똑같은 행위를 되풀이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우리의 눈앞에서는 사라졌다.
우리는 바에 들어서면 우리 본래의 모습, 본질, 성격, 꿈과 희망 위에 바텐더의 가면을 덮어쓴다. 마음속의 무언가를 억누르고, 눈앞의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바텐더로서 활약한다.
A는 반대였다. 그녀는 바텐더라는 자신의 입장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썼다. 혹은 바텐더라는 가면을 쓰길 거부했던가.
그것이 그녀와 우리의 가장 커다란 차이였다. 그녀의 허언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많은 성격적 결함을 가진 바텐더들도 무리 없이 협력하여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텐더였으니까. 나이와 학벌, 집안 환경과 성격에 얼마나 차이가 있던 상관없이 바 안에서 우리가 쓰는 가면은 동일했고, 그것이 우리를 동료로 연결해 주었다.
그것을 거부하는 A가 다른 바텐더들에게 얼마나 이질적이고 껄끄러운 존재였을까.
게다가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A는 자신과 동료들을 구분하였다. 자신이 현재 돈을 벌고 있는 일에 대한 존경도 없이, 그것을 한낱 임시방편적 행위로 경멸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다른 바텐더들도 함께 경멸하였다.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그다지도 참을 수 없게 다가왔던 것은, 우리 스스로, 바텐더들 스스로도 본인들의 이 직업에 존경을, 애정을,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A가 미움을 받고 고립되더라도 바텐더라는 가면을 끝끝내 거부하려 했던 이유를. 그 경멸의 이유 있음을.
우리는 모두 바텐더라는 직업을 몹시 필요로 하는 동시에 또한 증오하고 있었다. 그것을 시시때때로 상기시켜 주는 A를, 우리는 ‘바텐더’인 자기 자신을 대신하여 증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