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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바텐더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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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Aug 15. 2017

bartender 28

위스키, 보드카, 브랜디, 데킬라, 그리고 우리는... 5

그의 분노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가볍게 향후 우리가 꿈꾸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였고, 떠드는 입중에서 가장 신이 난 것은 아마도 나였을 것이다. 

근 시일 내에 작고 작은 나만의 공간, 꿈꾸던 가게를 낼 예정이었던 나는 들떠 있었고 누군가에게 나의 아름다운 계획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필시 나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을 테고 내 눈동자는 행복에 겨운 광채를 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때의 나는 주위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나를 보는지 잘 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갑작스레 터져 나온 손님의 분노에 처음에는 몹시 당황하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는 진심으로 단어 하나하나에 짜증과 분노를 담아 나를 질타하였다.


“니 계획이 뭐든 간에 니가 뭐라고 건방지게 무슨 가게를 한다느니 무슨 얼마에 얼마라느니 주제넘게 떠들고 있어. 그렇게 모든 게 다 니 뜻대로 될 줄 알아? 내가 니 개좆같은 그런 잘난 체나 들어주는 사람이야? 좆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니 여기 왜 앉아있어? 니 자랑하고 허세부리고 싶어 앉아있어? 씨발, 별 것도 아닌 게 비위 상하게 하고 있어.”


실로 오랜만에 내 입을 틀어막고 머릿속을 공황상태로 만든 손님이었다. 나는 빠르게 기억을 되돌려 무엇이 문제였는가 찾아보았다. 그러나 내가 가진 명석한 사고나 이해력은 이미 스위치가 눌러진 분노에 의해서 잠시 뒤켠으로 밀려나 있었던 상태였다. 

기계적인 사과가 먼저 튀어나왔다. 오랜 세월 몸에 배인 대처가 나를 구했다. 나는 앞의 남자에게 ‘잘난 척’ 하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내가 너무 경솔하게 말했노라고, 아무 생각 없이 떠들었다고 백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용서를 구했다.


집으로 돌아와 나를 위로해주는 담요 속에 파묻혀, 그 날 밤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내 무엇이 그 남자를 건드렸을까. 나는 왜 그러한 말들을 들어야 했을까.

피로가 나를 서서히 침몰시켰고, 개운치 못한 몸으로 일어난 내가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은 몇 년 전 들었던, 재판장의 마지막 선고처럼 단호했던 누군가의 말이었다.


‘니가 왜 행복해? 넌 절대 행복할 수 없지. 그건 거짓말이거나 너 스스로 자위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 잘 생각해봐.’


시간이 많이 흘렀건만, 나는 그의 말을, 몇 번 오지도 않았던 이름도 모르는 어떤 손님의 말을 이다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것은 천정에 붙어 떼어내기 곤란한 딱지처럼 붙어서, 고개를 숙여 외면하고 잊었다가 이따금씩 벌레인 듯 얼룩인 듯 시야에 나타나 불쾌감을 주며 영영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의자를 찾아 딛고 올라가 그것을 떼어내기보다, 외면하여 잊는 방법을 택한 듯하였다. 그리고 완벽하게 쓰러져 고개를 돌릴 힘도 없어질 때면 여느 때보다 선명한 그 검은 딱지를 마주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도 그러했다.

그리고 그것은 만족할 수 없는 삶을 사는 누군가에게 큰 불편함으로 다가가는 것 같았다. 그 몇 년 전, 야구 모자를 눌러쓴 그 남자는 자신이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고 씀씀이도 그에 걸맞았다. 그러나 그 재력은 안정적인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요행에 가까운, 도박과 비슷한 어떠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 자신은 더욱 더 많은 재산을 모아 불안을 날려버리고 어떠한 것에도 흔들림 없는 행복을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그는 구체적인 목표액까지 말하며 그것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행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가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는 나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지? 너가 지금 이 일을 니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잖아? 그럼 그것만으로도 불행한거지. 입으로만 행복하다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봐줄 줄 알아? 그냥 안쓰러워서 아무 말하지 않는 거야. 니가 행복하다면 행복한 걸 보여줄 근거를 만들어 봐. 뭘 가졌는데? 아무것도 없잖아. 그리고 여기서 내가 막말로 너한테 욕을 하든 진상을 떨든 니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그걸 참는 게 니 일인데, 그런 일을 하면서 니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어?”


그가 손님이었기에 내가 반박하지 않고 억지로 수긍했다면 그것은 비겁한 변명이다. 나는 정말로 저 말에 반박할 어떤 문장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말로써, 논리로써 타파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줄 말이 한 단어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면 행복하지 않은가? 내 안의 욕구를 체념하고 마치 현자의 시늉을 하면서 분노를 억지로 삼키며 흔히들 하는 말로 ‘정신승리’로 내 서글픈 현실을 잊고 사는 비겁자일까.

내가 떠들었던 기쁨과 만족, 내 생활의 즐거움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을까.

사실은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새벽의 파란 공기 속에, 알콜에 적셔진 나의 한탄이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정오의 햇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늙은 여인의 주름처럼, 쪼글쪼글 쪼그라든 심장을 갈라 열어보면 사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비참한 허세, 응어리져서 딱딱해진 검은 분노, 그리고 한 움큼의 바스러진 희망의 가루들이 묻어 나오진 않을까.


천장에 붙은 저 딱지를 떼어내었을 때, 그 뒤로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공간이 마치 블랙홀처럼 나의 마지막 남은 기력마저 빨아들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나는 이 글을 써야했고, 그러기 위해선 이 모든 것을 정리해야 했다. 

타고난 낙천이 언제나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자, 나의 의자를 가지고 오자. 의자에 올라 까치발을 세우고 고개를 들어보자. 그리고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 온 저 딱지를 떼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진짜 불행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그래, 왜 그들이 나에게 저렇게 못되게 구는 것인지, 왜 그들은 나를, 바텐더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불행한 존재로 남기를 바라는지, 그것도 한번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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