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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May 16. 2021

내 영혼의 소박한 쉼터

비오는 밤 가로등 (출처:네이버)


깊은 밤, 유리창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나만의 자리에 앉습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지친 몸으로 퇴근해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까지 끝나고 나면 

나만의 세계로 들어옵니다.

매일 색다른 것을 찾아서 들어가는 이 시간이 설렘으로 가득 찹니다.

오늘은 누군가의 어떤 글을 읽을까. 나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미지의 세계를 즐기는 시간을 하루 동안 간절히 기다립니다.

출근해서 업무를 할 때는 이 시간을 잊고 있다가 퇴근 무렵이 되면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마트를 들러서 장을 보는 일도 잊습니다. 가끔은 아이쇼핑을 즐겼던 일도 이젠 흥미를 잃었습니다.

종종거리는 내 발걸음은 어서 빨리 나만의 보금자리로 가라고 재촉합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세상살이의 일들을 모두 내려놓고 지친 영혼이 쉴 수 있는 나만의 자리로 오라고 

손을 잡아끌어 줍니다. 

억지로 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나는 홀리듯 그곳에 가서 나만의 의식을 치릅니다.


주방에서 몇 발자국만 떼면 거실 창가에 자리한 소박한 공간이 나의 케렌시아입니다.

투우장의 소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장소를 케렌시아라고 한다지요.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지친 심신을 재충전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인 거죠.

설거지를 끝내고 싱크대 상판의 물기를 마른행주로 닦아내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을 나옵니다.

물에 젖은 손을 툭 툭 털고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시작되는 나만의 의식을 치르는 공간으로 향합니다.


깊은 산속, 조용한 산사에 불이문을 통과할 때 느끼는 마음가짐이랄까요.

세상과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그 문을 통과하면서부터 달라지는 경건한 마음처럼.

나는 매일 밤 세상 한가운데 자리한 공간에서 오로지 나 혼자만의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이 세계에서 나를 더 깊이 생각하고 그대를 그리워하며 지난날을 추억하기도 합니다.


글을 써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지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합니다.

읽으려고 준비한 책들이 쌓여 한 권 한 권 그 책의 세상을 들여다볼 생각에 봄날 벚꽃 피듯 

가슴에 뜨거움이 팡팡 피어오릅니다.

책 속 가득히 춤추는 활자들만 바라봐도 내 영혼의 양식이 쌓여가는 느낌을 아실는지요.


가끔은 뉴스나 스포츠를 틀어버리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눈 흘김 한 번 하고 맙니다.

조금 참고 기다려주면 왕왕거리는 티브이를 끄고 자리를 뜨니까요.

그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디오를 켜고 내가 좋아하는 주파수를 맞춥니다.

밤의 어둠처럼 깊고 묵직한 울림을 주는 DJ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집니다.


누군가 비 오는 날에 어울리는 사연을 보내왔습니다.

신청곡이 흘러나오네요.


"조용히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주듯이.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날이 생각이 나네~

옷깃을 세워주면서 우산을 받쳐준 사람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 사람 생각이 나네."


오래전 그날.

그날도 비가 왔었죠. 

나에게 우산을 씌워줬던 그 사람이 나만의 케렌시아로 찾아오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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