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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Mar 04. 2022

J의 롤러코스터


맨발인 채로 집을 뛰쳐나온 J는 말 그대로 광녀 행색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자동차 키만 들고 도망쳐 온 것이다. 민소매 블라우스에는 몇 군데 핏자국도 있었고, 얼굴과 팔에는 붉은 멍 자국이 선명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빗어 넘겨주니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터트린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꼭 안아 줬다.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내듯 울부짖던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안정을 찾았다. 핏발 선 눈동자에는 증오가 가득했다. “개새끼,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어.”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나랑 같은  동아리 선후배였다. 그녀는 집안도 부유했고, 외모도 어느 한 군데 빠지지 않았으며 성적도 좋았다. 그야말로 엄친딸이었다. 동기들이나 선배들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았고 다른 학교에서도 늘 그녀와 소개팅 한번 하기 위해 뻔질나게 드나드는 남자들도 많았다. 그녀는 운도 좋았는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에 취직도 쉽게 했다. 회사는 달랐지만 같은 지역에 있어서 우린 종종 만나 식사도 하고 수다를 떨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주로 내 얘기를 물었고 나는 그저 평범한 남자와 만나 평범한 연애를 하고 평범하게 한 가정을 꾸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가 요란하게 결혼식을 준비할 때, 나는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로 퉁퉁 부은 젖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언니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도 좋아 보인다며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부러워했다. 나는 그저 웃어넘기며 신랑은 좋은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냥 그렇다며 부모님이 좋아하시니 하는 거야 하고 뭔가 복잡한 심경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자기 애 낳게 되면 언니 애 옷 물려 입겠다며 농담도 했다. 갓난쟁이를 업고 강남의 호텔을 갈 자신이 없던 나는 미리 축의금을 줬지만, 그녀는 돈 받으러 온 거 아니라며 아이 옆에 한참을 누워 있다 떠났다. 


그녀가 신혼여행을 잘 다녀왔는지 궁금했지만, 나 또한 육아에 정신이 없던 나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하게 되었고 부잣집에서 어련히 잘살겠지 생각했다. 갓난아이가 돌 즈음되었을 때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시댁에서 해준 강남의 고급 아파트는 일 년도 못 살아보고 이사를 해야 했고 고급 외제 차는 어느새 국산 소형차로 바뀌었다. 모임 장소와 때에 따라 구색을 갖췄던 명품가방과 보석은 처분되었다. 양말 한 짝도 메이커가 아니면 신지 않는다던 그녀의 남편은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철창신세가 되었고, 남은 뒷수습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나름 알부자였던 그녀의 부모님이 나서서 어느 정도 해결해 줬을 때 남편은 풀려났고 그 이후의 생활은 그녀에게 더 큰 지옥이었다. 한 번 나가면 며칠씩 외박을 하던 남편은 어쩌다 집을 들어와도 잠만 자고 나가거나 무리한 돈을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분이 풀릴 때까지 폭력을 쓴 것이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날, 그러니까 광녀 행색을 하고 우리 집으로 온 날, 그녀는 남편을 죽을힘을 다해 밀어내고 잠깐 기절한 사이에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시던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집으로 가서 안정되면 떠나라고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고 했다. 급한 대로 내 옷과 신발, 필요한 몇 가지 것들을 챙겨줬다. 

보장된 미래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그녀, 이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현실에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나는 언니한테 해 주는 데 없는데 언니는 내가 힘들 때마다 내 곁에 있어 줬어”라며 말라서 툭 불거진 광대뼈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만 원짜리 몇 장이 전부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애써 눈물을 참아낸다. 몇 달이 지난 후 나는 그녀가 머문다는 영월의 어느 산사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었다. 46번 국도를 따라 간 그곳은 국도변을 벗어나서 구불한 산길이 이어지는 깊은 곳이었다. 늦여름의 태양은 맹렬했지만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인 산사의 공기는 상쾌했다. 배롱나무에 꽃이 붉게 물든 절간의 처마 밑에 밀짚모자를 눌러쓴 그녀가 보였다. 배롱나무 꽃잎보다 더 붉어진 그녀가 나를 보자 서글픈 미소를 짓는다. 그녀와 나는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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